[팝송산책] 여성 팬들의 심금을 울린 베스트 1위의 곡 허무한 마음(노래: 정원)
2020-08-14 (금)
정태문
필자가 디제이 초년병 시절이던 1966년 초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음악 감상실에 출근하여 막 첫 곡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다음곡을 준비하고 있는 중에 누군가가 디제이 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와 보니 왠 낯선 사람이 인사를 하면서 잠시 얘기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한 장의 데모 음반을 나에게 건네 주면서 틀어 줄 수 있느냐고 간절히 부탁했다. 데모 음반이란 주로 신인가수나 상업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의문시 되거나 할때 정식 음반을 인쇄 하기 전 약 50~100장 정도 음반을 미리 제작하여 각 라디오 방송국과 음악 감상실에 보내 청취자의 반응을 테스트하는 사전 PR용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그의 데모 음반에는 번역 가요 ‘사냥개,’ ‘똥그랑 땡,’ ‘훳 아이 쓰이’와 창작곡 ‘허무한 마음’이 수록 되어 있었다. 그리곤 특별히 ‘허무한 마음’을 틀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했다. 음악 감상실은 국내 가요는 틀어 주지않는 전통이 있었지만 그의 간절한 요구 때문에 필자는 우선 번안 가요 ‘사냥개’를 턴테이블에 올려 놓고 틀어 주었다. 그러자 그는 계속해서 ‘허무한 마음’을 요구했다. 그리곤 그의 강요(?)에 할 수 없이 ‘허무한 마음’을 들려 주었다. 그는 계속해서 감상실에 머무르면서 다음 디제이에게도 같은 것을 요청했다. 그는 하루 종일 이곳에서 머무르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아마 부산으로 간 것으로 추측된다. 한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한달 쯤 지난 후 ‘정원’은 다시 필자의 감상실에 나타나 본인의 노래들을 PR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 동안 전국을 돌면서 PR활동을 했다고 미소를 띄면서 얘기했다. 한달 전 보다는 얼굴이 활기가 있어 보였다. 그의 노래가 매스컴에 탄지 불과 한 달이 채 안 되지만 그의 노래 ‘허무한 마음’은 예상과 달리 음악 감상실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몰고 가고 있었다. 그 당시 가수들은 음반을 제작한 후 선전하기 위해 각 지방마다 라디오 가요 담당 프로듀서, 음악 감상실 디제이를 찾아 다니며 순회하면서 그렇게 발로 뛰었다. 물론 지금과 달리 매니저도 없이 혼자 모든 일을 했어야 했다. 그는 방송보다 음악 감상실을 통하여 일어선 가수였다. 스폰서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음반을 턴 테이블에 올려줄 매체를 찾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음악 감상실과 라디오 방송국 두 군데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각 지방 방송국과 음악 감상실을 찾아 다니며 자신의 음반에 대해 직접 설명하였다. 그의 음성에는 애절함이 묻어 있었다. 그의 음반을 반드시 소개 해줘야만 하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무엇이 있었다. 우리 디제이들 모두 그를 밀어주자는 무언의 약속이 있어 그 이후부터 그의 노래는 대구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초기에 그의 노래가 각 방송국마다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모든 음악 담당 프로듀서가 그의 노래에 관심을 가져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괜찮은 것 같군 하면서 열심히 소개해주기도 하며 또 어떤 담당자는 그의 음반을 어디에 보관 했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발생했다. 방송국으로 그의 노래 ‘허무한 마음’이 끊임없이 희망곡으로 들어오자 그제서야 ‘허무한 마음’이 누가 부른 노래냐면서 음악 감상실 디제이에게 물어보는 촌극이 발생했다. 음악 감상실이란 팝 음악만 소개하는 장소란 불문율을 깨고 국내 가요 곡인 ‘허무한 마음’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어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케이스였다. 세월이 흘러 봄이 찾아 왔을 땐 그는 어느 덧 무명가수가 아닌 꽤 알려진 가수로 태어났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가진 것이라곤 빼어난 노래 실력 밖에 없는 그가 그 짧은 기간 동안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허무한 마음’이란 노래의 마력 때문 인 것 같다. 그의 노래는 분명 그동안 들어오던 종전의 국내가요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흑인 음악에서만 볼 수 있는 소울 있는 특유의 느낌을 그의 노래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호소력과 감성이 어우러진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 여성팬들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었다. 언제 들어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요소들이 모두 함께 해 만들어진 ‘허무한 마음’은 당연히 히트할 소지를 지녔다. 무한한 잠재력을 간파한 디제이들은 아낌없이 그를 밀어주고 그는 열심히 각 지방을 돌며 PR(선전) 활동을 했다. 그 결과는 대 성공으로 이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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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