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팬데믹 시대의 또 다른 영웅들

2020-08-07 (금)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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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로 세탁소 매출이 급감하자 보잘 것 없는 가게 수입을 보전하기 위하여 일자리를 구하던 중 마침 근처 우체국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원서를 냈다. 온라인으로 필기시험과 적성검사, 신원조회를 거치고 마지막 관문인 면접까지 본 다음 마침내 합격통지서를 받아들었을 때의 기쁨은 젊었을 적 대학졸업 후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만큼이나 컸다.

사람을 자산으로 친다면 회계장부상 감가상각 처리가 한참 전에 끝났을 70대 노인을 나이 차별 안하고 써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얼굴 사진이 들어간 신분증 배지도 근사했고 첫 번째 주급 받던 날 가족들이 좋아하는 프라이드치킨을 한아름 사갖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도시가 아직도 깊이 잠들어있는 어두운 새벽거리를 달려 우체국에 도착하면 먼저 나온 직원들이 벌써 일을 시작하고 있다. 새벽시간에 주로 하는 일은 아침에 출근하는 우체부들이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우편물을 챙겨주는 일인데 요즈음은 편지보다 물건 박스가 더 많다.


머리 위 1m 쯤 되는 곳에 설치되어있는 직사각형의 레이저 스캐너 밑으로 우편물을 들고 지나가면 포장 겉면에 표시된 바코드가 읽히면서 배달 루트 번호가 음성과 LED디스플레이로 나온다. 스캔이 끝난 우편물은 40여명의 우체부 별 루트 번호가 적혀있는 커다란 컨테이너에 각각 던져진다. 새벽 우체국 작업장은 우편물 스캔하는 소리와 소포 박스 던져넣는 소리로 쿵쾅 쿵광 벅적 벅적 활기를 띈다.

팀을 이루어 작업하는 업무 특성상 우체국 작업장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땀이 나고 답답하니 마스크를 내려 턱이나 입만 가리고 일하는 직원들이 많다.

지금까지 이 우체국에서만 아홉 명의 코비드-19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한국 같으면 즉시 건물을 폐쇄하고 전 직원 검사와 건물 내부 소독을 철저히 실시했을 텐데 이곳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정상근무중이다. 직원 출입시 체온 측정도 안하고 그 흔한 손세정제조차 비치되어 있지 않다. 개인보호장비라야 각자가 쓰고 있는 마스크와 우체국에서 지급하는 고무장갑이 전부이다. 각자가 알아서 조심하라는 것이다. 미국에 왜 그렇게 많은 확진자가 나왔는지 이곳에서 근무해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과학을 무시하고 애써 코로나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부인해온 미국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대면 접촉을 꺼리는 코로나 시대에는 각종 생필품은 물론 처방약이나 의료용품도 우편으로 배달 받는 사람들이 많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변함없이 우편물을 들고 시민들의 문 앞을 찾는 라이트블루 제복의 우체국 직원들은 의료진과 구호요원 못지않은 코로나 시대의 영웅들이다.

정부는 방역 예산이 필요하면 예산을 책정해주고 전염병 예방을 위한 프로토콜도 마련해서 우정공무원들이 건강하게 대민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들이 병들면 그것은 각자의 책임이 아니고 나라의 책임인 것이다.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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