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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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위로

2020-07-30 (목) 케이 김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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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이든 백 평이든 텃밭 가꾸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교과서 ‘자연농 교실’ 표지에는 시퍼렇게 잘 자란 배추 사진이 걸어서 튀어나올 듯 싱싱하다. 책을 쓴 자연 농부, 가와구치 요시카즈씨(80세)는 땅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산다. 비폭력 농사와 비폭력 먹거리가 그의 신념이다.

경운기 없이, 농약이나 화학비료 없이, 제초 없이! 네 가지를 지켜낸 농장에서는 온갖 과실과 채소가 햇빛 먹고 자란다. 그는 “이른 아침 밭에 나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이슬 구르는 잎새들, 익어가는 곡식을 바라보는 것이 나에게 날마다 감동이고 기적”이라고 말한다.

흙은 힐링이다. 긍정심리학의 대가 셀리그만 교수는 자연 소재가 주는 치유의 놀라운 결과들에 주목한다. 행복은 연속 가능한 성격의 모습이 아니라 순간적인 마음 상태이다. 행복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일곱 가지 심리적 요소는 ‘몰입’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1. 기술이 필요한 도전적 일(심고 가꾸기) 2. 뚜렷한 목적 아래(꽃 피우기, 열매 거두기) 3. 눈앞에서 피드백을 주며(물을 주면 싱싱하게 잎이 살아나는 것) 4. 시간 가는 줄 모를 것(많은 텃밭 주인들의 공통된 경험) 5. 자의식이 사라지며(과도한 자기주장 소멸) 6. 주체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고(내 정원의 주인은 바로 나!) 7. 집중하다 보면(잡념이 사라짐) 마침내 몰입의 경지에 다다른다.

아파트 베란다의 작은 공간, 시멘트로 덮인 마당 한구석, 플라스틱 화분인들 어떠랴. 한 때 씨앗이었다가 빼꼼, 머리에 이고 있던 흙을 비집고 싹을 만들며, 얼마 안가 매달아낸 토마토와 오이, 고추! 이묘신 작가의 시도 흙을 말한다. 제목 흙님. <할머니가 옥상에다 고추 모종 심던 날 흙 구하기 힘들다며 속상해하셨다 시골 가면 밟히는 게 흙인데 흙 구하기도 힘들다며 뒷집 화단을 넘겨다보셨다 흙 필요하면 퍼다 쓰세요 뒷집 아줌마 소리에 얼른 흙을 담아 오시며 할머니가 소리치셨다 흙님 모셔왔다>

나는 몇 년째 캘리포니아 올개닉 야채가든 클럽 멤버다. 게을러서 포스팅은 생략, 다른 회원들의 주저리주저리 이야기 풍성한 가든을 보기만 한다. 농장 출신 할머니, 도시가 싫어 시골에 정착한 젊은 부부, 전문직 은퇴자들이 자기 집 텃밭에 가꾼 유기농 채소와 싱싱 과일 사진을 올린다. 얼마큼 깊이 흙을 파고 심으며 모종 간격은 몇 인치, 뚱뚱 수박의 무거운 몸통은 언제 뒤집어주는지 친절히 설명한다. 사진 속, 향이 맡아질 듯 신선한 허브와, 튼실한 열매들을 들여다본다. 방금 따낸 열매꼭지엔 자연시간에 배운 표면장력인가? 투명한 물방울이 맺혔다. 이쁘다.

흙은 우리에게 몰입을 경험시킨다. 몰입은 강한 긍정적 정서다. 일상의 경계를 뛰어넘는 환희다. 우주와 하나된 엑스터시와 지금 이 자리(Here & Now)를 만끽하는 충만감이 있다. 시간의 흐름마저 잊는 호접몽(胡蝶夢)도 몰입의 결과물이다.

흙 만지기와 텃밭 가꾸기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정신건강 관련, 긍정적 지원정책으로 활용된다. 유럽 도시민의 경우 청소년의 분노와 공격성이 66% 감소되었으며, 노년기 우울감은 59% 감소, 긍정호르몬인 세로토닌은 47% 향상,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저하 반응은 34%의 효과를 나타냈다.(세계예방의학보고서, 2015)

우리 야채클럽 멤버들이 말하는 흙의 위로는 행복한 몰입이다. 흙에 가까이 무릎 구부려 일하는 겸손한 자세와 텃밭을 가꾸는 가족들 사이의 유대감, 열매를 거두는 일상의 놀라운 기적, 거기다 풍족한 수확을 아낌없이 이웃과 나누는 기쁨도 있다. 코로나 19로 무너질 듯 어수선한 삶에 더 무엇을 바랄까?

<케이 김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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