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9일, 연방 대법원은 맥거트 대 오클라호마(McGirt v. Oklahoma) 사건 재판에서 인구 50만의 도시 털사(Tulsa)를 기준으로 오클라호마주의 동쪽 절반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이 곳으로 강제 이주당한 다섯 원주민 부족, 즉 체로키(Cherokee), 머스코지(Muscogee), 세미놀(Seminole), 치카소(Chickasaw), 촉토(Choctaw)족의 땅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97년 4살 여아를 성폭행해 오클라호마주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을 마친 세미놀족 원주민 짐시 맥거트(Jimcy McGirt, 71세)가 ‘현행법상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벌어지는 중범죄는 연방법원에서 재판하는 게 맞지 주 법원은 자신을 재판할 권한이 없었다’고 재심을 주장하며 시작됐다.
맥거트의 이와 같은 법리 주장의 뿌리는 까마득한 19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백인 이주민들은 미국 남동쪽에 터전을 잡고 있던 위 다섯 부족 원주민들의 땅을 야금야금 빼앗고 있었는데 1828년 조지아주 북쪽의 작은 산골 마을 달로네가(Dahlonega)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본격적인 야욕을 드러냈다.
대표적으로 조지아주 당국은 원주민들에게 금 채굴금지를 비롯 토지 매매금지, 백인상대 불리한 증언금지 등을 강요하는 차별적 법률을 통과시키고 민병대를 시켜 원주민들을 쫓아냈다.
촉토 같은 부족은 탄압 초기에 일찌감치 연방정부와 조약을 맺고 반자발적으로 이주했으나 체로키족은 북부에서 온 기독 선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법적 싸움을 전개하며 끈질기게 저항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그 결과 1831년 체로키족 대 조지아(Cherokee Nation v. Georgia)와 이듬해의 우스터 대 조지아(Worcester v. Georgia) 사건을 통해 당시 대법원장인 존 마샬로부터 ‘인디언들의 영토는 미국의 준독립 보호령에 속하기 때문에 각 주의 법률은 보호령 안에서는 효력이 없다’는 원고 승 판결을 받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해 백인들은 원주민 보호구역 안에 있는 인디언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호사에서 군인으로 변신하여 크릭과 세미놀족 토벌작전에서의 전공을 통해 1829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루 잭슨은 “마샬이 그런 판결을 내렸다고? 그럼 자기가 그렇게 집행해 보라지!”라며 대법원의 결정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잭슨은 자신의 주도하에 미 연방의회가 1830년에 통과시킨 ‘인디언 이주법’을 내세워 위 다섯 부족 원주민들을 현재의 오클로호마주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이때 원주민들이 여름의 각종 전염병과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 시달리며 9개 주를 거쳐 걸었던 2,200마일의 루트는 1987년 미의회에 의해 ‘눈물의 길 역사의 길’로 지정되었다.
이랬던 아메리칸 원주민 수난의 역사가 맥거트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문자주의자 법률가 고서치 대법관은 진보 성향의 다른 대법관 4명과 의견을 함께하며 다수 판결문을 작성했다.
그는 “눈물의 길 건너편엔 약속이 있었다”고 운을 뗀 후, 미 의회가 1830년대 초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며 원주민 대표와 맺은 조약에서 “미시시피강 서쪽에 지정된 보호구역의 땅은 영원토록 원주민들의 것”임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이 땅의 사법관할권은 아직 원주민들에게 있다고 판결했다.
반면 로버츠 대법원장은 반대의견을 통해 법원의 결정이 오클라호마 형사사법 시스템에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판결은 재심 청구에 따라 형사사법권에 국한된 것이지만 연방정부와 원주민 부족들 간에 맺은 조약이 아직 유효함을 대법원이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향후 오클라호마주의 유전수익과 세금, 치안문제 등 많은 분야에 후폭풍이 몰아칠 것으로 전망된다.
가까운 예로 이번 판결의 주인공 짐시 맥거트처럼 주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원주민 상당수는 당장 다시 재판을 해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
손경락/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