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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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이민들의 고생

2020-07-28 (화) 최효섭 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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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들의 고생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보다 나 자신이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를 이야기하면 초창기(1970년대) 이민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뉴저지 주 남부 농촌지역에 짐을 풀었는데 목사가 할 일은 전혀 없었다. 영어 목회는 전혀 자신이 없고 한국어 목회를 해야 하는데 한인들이 남부 뉴저지에는 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우범(虞犯)소년들 즉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하여 가정에서 키울 수 없는 소년들을 모아 집단생활을 하는 시설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선도하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말이 지도자이지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은 강당 같이 넓은 식당과 화장실 둘을 청소하는 노동이었다.

여기는 거리가 멀어 힘도 들고 시간 낭비도 있어나는 일할 곳을 옮겼다. ‘베니스메이드’라는 깡통식품 공장이었다. 100파운드나 되는 큰 밀가루 포대를 들어올려 기게에 붓는 작업인데 노동을 해보지 않은 나는 힘이 딸려 쓰러지고 말았다.


공장장의 새로운 지시가 내렸다. “너는 바깥 일을 해라”하는 지시다. 바깥일이란 식품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다. 식품 쓰레기를 큰 드럼통에 넣어 트럭에 싣고 쓰레기 처리장에 버리는 일이다. 그 때만 해도 모든 트럭은 수동식이었으므로 자동기아로만 배운 내가 트럭 운전을 하자니 동료 노동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공장에서는 쓰레기 치우는 일 외에 사장과 공장장 두 사람의 주택 잔디 깎기도 시켰다. 남부 뉴저지의 부잣집 주택이란 한 성을 방불케한다. 넓은 동산 꼭대기에 집이 있고 그 주변 동산 전체의 잔디를 깎아야 한다. 석사 학위를 둘씩(신학과 교육학) 가진 인테리도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겪는 고생의 과정을 다 겪어야만 하였다.

그 후에 사회사업 보조원이란 일도 하였다. 정부의 사회복지금을 정말 받아야 할 사람이 받는 지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나는 미국의 가난한 약 200 가정을 방문하였는데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고 정말 놀랐다.

엉터리 보고를 하여 사회복지금을 받는 자들도 수두룩하다. 실제로 방문해 보면 안에서 분명히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데 여자가 나와 버젓이 “남편은 집을 나간지 오래고 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큰 소리로 말한다. 알면서 속는 거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미국이다.

포트노리스라는 마을에 가면 마을 전체가 사회복지금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마을인데 상자로 지은 건물이 길게 있고 칸칸이 사람들이 살며 변소는 멀리 뒤에 별도로 지은 곳도 있다. 미국도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보면 한국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극빈자들이 수두룩한 곳이 미국이다.

커네티컷주 하트포드에 사는 한인 한 사람이 내가 뉴저지 주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해왔다. 하트포드에 한인교회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승락하였다. 교회라면 나의 전문분야이니 미국에 와서 이런 기회는 있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이 하나님이 나에게 부과한 운명인 것 같다. 피난 시절 부산에 성진교회를 개척, 환도 후 서울에 혜명교회를 개척, 미국에 와서 하트포드 교회, 남부 뉴저지 교회와 파라무스에 아콜라 교회를 개척하였다 다행히 문 닫은 교회는 하나도 없고 다섯 교회가 모두 왕성하게 부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가 개척하지 않은 유일한 교회는 100주년 역사를 맞는 뉴욕한인교회 뿐이다. 이민 후배들이여 선배들의 고생을 기억하고 힘을 내라.

<최효섭 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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