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그대는 시계를 두려워하지 않아/ 그대 이미 시간 너머 품에 안겨 있으므로/
시간 날카로운 겨울바람/ 씨앗의 몸부림과 잔잔한 인내/오해 속에 익혀/
어차피 장미는 어제도 그랬지만/더러는 오늘 내일 도시의 거리/ 외서러븐 자리 찾아 고요한 꿈을/ 꿀 것이다/
그대 비록 작으나 뿌리는/ 땅과 하늘 분간 없이 피고 지고/ 다시 피어 청 푸름 깊은 시간/무지개 피는 날/그대와 함께 나는 그늘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시의 시리즈를 ‘ 탈 코로나 4계 ’라 명명했다. 그리고 장미를 앞세웠다. 그러나 아직도 길이 먼 것은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의 인내와 꿈이 필요하므로. 고통에는 양심을 들어내는 데 예리하다. 더욱 지금과 같은 온 세계가 코로나로 고통 하는 공포와 불안의 시대에는.
이태리 작가 파올로 조르다노는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에서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가려져있던 진실을 대면하게 하고, 인생의 우선순위를 직시하게 한다. 현재의 부피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고 고통이 사라지면 깨달음도 증발한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고통 속에 우리에게 비추었던 진실이 희미해지는 현실에 대한 아둔함, 벼랑 끝에 매달리던 우리의 문명에 대한 부끄러움의 깨달음, 그것이 사라질까 염려스럽다. 전염병의 공포시대가 끝남으로 우리의 깨달음이 의미 없고 희미해짐이.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은 비겁함도 공포도, 공포나 두려움을 가지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요히 현재를 바라보며 인간의 양심과 믿음을 품는 일이다. 양심이 주는 믿음의 순결로 자유를 누리며 미래를 믿는 뉴모랄이다. 자연이 그것을 가리켜 주지 않는가.
찬 겨울, 땅 밑에 드러 누워 혹독하게 밟히며 견뎌 살아온 그들, 자연은 물론 일회성이다. 그러나 반복으로 일회성의 길을 걸어오며 쉬지 않고 인간에게 말해준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장미를 많이 생각했다. 그가 온몸에 두른 날카롭고 아린 가시를 깊이 사고하고 살며 나의 겨울과 코로나의 계절을 가벼이 가고 있다. 누군가 향기롭고 화려한 장미꽃을 주랴, 뾰족하고 아린 가시를 주랴, 한다면 나는 선뜻 할 말을 모르겠다.
우리 인생은 장미와 가시의 길을 수없이 걸어왔고 또 갈 것이다. 누군가 더러는 아파하며 절망하며, 더러는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꿈꾸며. 나와 그대는 이제 그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행여 있을 시행착오의 함정도 넘어서 장미꽃이 주는 가시의 길을, 그 지혜가 주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기도 하며 우리는 배워왔다.
가시가 있다고 장미꽃을 버릴 순 없다. 오늘과 현재 속에 장미꽃은 아니더라도 향기로운 들꽃, 구절초의 고고한 자태를 볼 수 있음을. 생은 축연이다. 때로 고통일지라도 축연의 연속이다. 생각과 받아들임에 차이이다. 자연의 창조의 길이 그것을 말해준다.
‘코로나의 사계 ’는 많은 보따리를 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비록 장미꽃처럼 언제나 화려하진 않지만 그 장미 뒤에는 가시가 숨어 있을 지라도. 코로나 탈 시대에서 우린 그것을 즐겁게 배워나갈 것이다. 어디에 있던 겸손하게 사랑을 연습하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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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희/올림포에트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