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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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기억하는 법

2020-07-18 (토)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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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지나고 난 자리마다 어김없이 꽃이 피어났고, 그 꽃잎 사이로 여름이 한 뼘씩 걸어왔다. 단지 몇 주일의 빛을 위해, 아니 넉넉하게 셈하더라도 한 계절을 다 채우지 못하고 스러져가면서도 마지막까지 가냘픈 가지 끝에 매달려 시들어가는 꽃을 보며, 어제는 연민이라 읽고 오늘은 경외함이라고 쓴다. 어쩌면 삶의 시간은 길이로만 기록되지 않는 역사이고, 오색빛으로 덧칠해지지 않아도 눈부신 풍경 되는 거라고 믿고 싶어졌다. 생(生)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황홀하다는 것을 엄숙히 받아들인다. 오늘따라 꽃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요즘의 일상은 기약없이 연장되고 있는 휴가같다. 어차피 삶은 무수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일 것이니 오늘도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여유있는 척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뜨겁게 내리쬐던 해가 기운을 잃어갈 시간을 기다려 산책을 나섰다. 습관처럼 늘 집의 왼쪽으로 돌아서 걷기를 시작하는데 오늘은 아내가 반대쪽으로 앞장서 걸었다.
평소에 눈에 익은 풍경인데도 방향을 바꾸니 조금은 낯설었고, 가끔은 긴장이 되었다.
해 질 무렵의 동네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거리는 더 적막해 보였고 오래된 이탈리아 식당은 오픈(open) 사인을 걸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식당 유리창의 반쯤 걷어 올린 블라인드 사이로 텅 빈 거리를 보려는 식당 안쪽이 보였고, 궁금증을 못 참고 식당 안을 보려는 시선이 먼지를 사이에 두고 노숙자처럼 서성인다. 저녁노을은 거리와 그 거리를 품은 남루한 식당마저 드라마틱한 풍경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비를 품고 부는 바람은 후텁지근했다. 발밑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든 아내가 무심코 그 꽃잎을 코끝에 대었다가 향기가 없다며 다시 내려놓는다. 순간, 떠난다는 것은 냄새마저 남기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떠난다는 것은 산다는 것보다 큰 결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내 생애에 한번이라도 그런 결기를 보인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스스로 용기 내어 떠난 적은 없었어도 손을 놓고 그저 떠내려간 적은 있었다고, 평소에 나 자신도 신뢰하지 못하는 기억들이 이번만큼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난 휴일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 다녀왔다. 지도를 검색해 찾아낸 낯선 곳에서 마치 그 마을 주민처럼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주말에 누리는 작은 즐거움이었는데 그동안 코비드(Covid 19)로 인해 잊고 살았었다.

이 작은 마을은 아일랜드 인들이 굶주림을 피해서 와 정착했다는 곳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성당을 세우고 옹기종기 모여 살던 200여년 전 초기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쉬어가던 작은 식당들은 문을 닫았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 방치된 작은 공원은 이름 없는 들꽃이 점령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쓰러지고 바람이 지나면 다시 일어서는 흔한 잡초였고, 정확히는 아내가 아침마다 일 삼아 뽑아내는 그 잡초였다. 성당 뒤쪽으로 돌아가니 작은 언덕이 있었는데, 언덕 아래로는 잡초의 무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멋진 꽃밭을 이루고 있는 잡초를 보며 아내와 나는 감탄사를 쏟아냈다. 산 아래에서 자란 탓인지 숲의 향기가 깊이 배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밤새도록 별 만을 쳐다본 탓에 눈이 멀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 하나쯤은 간직했을 법한 별모양의 보라빛 꽃이었다.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꽃을 꺾어와 투명한 유리병에 꽃아 두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서재는 깊은 숲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뒤늦은 나이에 등단이라는 것을 했다. 선생님의 최종 심사를 거쳐서야 겨우 걸음마를 떼고 세상 밖을 보게 된 것이다. 시상식이 있던 날, 선생님은 몇 권의 책을 내밀며 줄 것이 이것 밖에 없다고 수줍게 말했었다. 그 때 선생님은 세상으로 향해있는 내 눈을 막고 서있는 큰 산이었다. 그런데 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나와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 날의 하늘은 선생님의 삶이 그대로 투영된 듯 유난히 맑고 빛났었다. 이제 선생님은 해가 지는 바닷가 어디쯤, 아니 그 아득한 끝에 눈먼 섬으로 계시리라 믿는다. 바람이 불어 허허로운 날에도,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한 여름 밤의 푸른 별로 기억될 것이다. 오늘은 선생님의 책을 읽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하련다.

다시 여름이 짙어가고 그 찰라의 시간을 흘려보낸다. 생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뜨거운지, 그보다 귀한 이름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모르겠으나 사유한 것들에 색칠을 해 글로 옮겨보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번 여름을 기억하는 방법이 될 것이니.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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