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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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가 켜는 노래

2020-07-16 (목)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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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치자꽃이 피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람들은 유폐되었지만, 여름 꽃은 텅 빈 거리에서도 여전히 눈부시다. 언제쯤에나 꽃을 보듯 설레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치자 꽃잎이 어머니 옥양목 저고리 같다. 망백(望百)에도 아파트 독방에서 꿋꿋이 홀로 사시는 어머니께 전화를 올린다. 매일 즐겨 나가시던 시니어 센터도, 화기애애하던 교회당도 문을 닫은 뒤 아들 전화가 당신의 큰 낙이 되셨다. 홀로 외로움을 견디실텐데 찾아뵙지도 못하니 큰 불효다.

“눈에 익은 어머니의 옥양목 겹저고리/ 젊어서 혼자된 어머니의 멍울진 한을/ 하얗게 풀어서 향기로 날리는가/ 얘야 너의 삶도 이처럼 향기로우렴/ 어느 날 어머니가 편지 속에 넣어 보낸 젖빛 꽃잎 위에/ 추억의 유년이 흰 나비로 접히네” (이해인, ‘치자꽃’)


이북에서 홀로 피난 오셔서 결혼 이듬해 납북된 아버지를 그리며 홀로 사신 어머니. 강한 독립심으로 남에게 기대지 않고 사셨지만, 그 멍울진 한 때문에 사람을 늘 그리워하시는 당신이 치자꽃을 닮았다. 외롭지만 혼자 서려 하고, 혼자 서면 외로운 우리 모두의 삶이 코로나로 인해 더욱 슬픈 시절을 지나가고 있다.

사람이 외롭지 않은 거리는 얼마일까?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적정 거리를 2m로 규정했다. 바이러스가 못 건너는 안전한 거리. 두 팔 넘어 상관없는 타인과의 간격이다. 온기도 닿지 않고 표정도 없이 서로 얼굴을 숙인 채 피해가는 3인칭의 거리는 ‘당신과 나 사이의 저 바다’만큼 냉랭하고 외롭다.

소설가 백영옥의 글에 근접공간학(Proxemics)이란 말이 나온다. 인류학자 홀이 사람간의 공간을 4가지로 분류했다고 한다. 친밀한 공간, 개인적 공간, 사회적 공간, 공적인 공간.

가장 친밀한 공간은 46㎝ 이내로 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연인이나 가족 외에 누군가 불쑥 들어오면 본능적 거부감이 드는 거리다. 개인적 거리는 46~120㎝ 이내로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로 친한 친지들과의 관계다. 사회적 거리는 120~360㎝로 사무적 관계를 일컫는데, 사회적 거리 2m가 여기 속한다.

지난 주 태평양에서 높새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답답한 마음에 아내와 금문교로 향했다. 수십년 전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왔을 때, 고해성사 가듯 자주 찾던 곳이었다. 고향이 그리울 때나 스트레스로 가슴이 울적할 때, 또 둘째를 낳고 가슴 벅찰 때나 안개 폭포가 쏟아지는 장관이 보고 싶을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든게이트 위를 달리면 마음이 뻥 뚫렸었다.

그런데 그날, 금문교에 가까워올수록 풍금 소리가 났다. 단조로운 허밍 같기도 하고, 인디언 노래가락 같기도 했다. 예전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금속성 음향이었는데 아내는 깊게 흐느끼는 울음소리 같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새로 세운 난간 사이로 빠른 바람이 지나가며 생기는 예기치 못한 소리라고 한다. 최근 금문교에 자살방지 네트를 설치하며 시속 100마일 강풍을 견딜 만한 새 난간을 세웠는데 그것이 원인이라고 밝혔다. 단지 수마일 밖에서도 들릴 만큼 소리가 커서 엔지니어들도 당혹해 한다고 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새 난간 사이의 간격이 예전보다 훨씬 좁게 설치되었다고 한다. 문득 아, 친밀한 거리로 좁혀졌구나 싶었다. 2m 사회적 거리에선 공명과 공감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포옹할 만큼 가까이 설 때 미물인 철책 난간마저도 스치는 바람과 공명을 일으켰다. 함께 노래 부르고 풍금을 켰다. 이게 자연의 순리였다.

사람이 외롭지 않은 거리는 얼마일까? 서로 가슴을 열고 노래할 수 있는 거리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마스크를 벗고 입을 모아 합창할 수 있을까? 오늘도 치자꽃은 뺨을 맞대고 서로의 향기를 맡고 있다. 벌이 오면 같이 노래도 할 것이다. 정말 언제쯤에나 홀로 계신 어머니를 포옹해드리며 치자꽃 한 다발을 안겨드릴 수 있을까.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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