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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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무게

2020-07-14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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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나온 ‘미션’은 1750년대 남미에서 벌어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처치 타임스’에 의해 ‘가장 뛰어난 종교 영화’로 꼽히기도 한 이 작품은 얼마전 타계한 영화 음악의 대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라는 멜로디로도 유명하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 로드리고 멘도사가 자신의 갑옷과 칼을 묶은 짐을 끌고 폭포를 오르는 부분이다. 용병이자 노예상인인 로드리고와 정략 결혼한 칼로타는 그의 이복 동생 펠리페와 사랑에 빠진다. 로드리고는 둘이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펠리페와 결투를 벌여 그를 죽인다.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지만 우울증에 빠진 그에게 인디언 선교사 가브리엘은 참회와 함께 죗값을 치를 것을 권하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무거운 짐을 지고 높은 곳을 오르는 속죄의 의식을 행한다. 원주민들은 그의 짐을 끊어주고 그는 인디언들을 지키기 위해 스페인 군대와 싸우다 목숨을 내주는 것으로 노예상인이자 살인자였던 자신의 죄를 씻는다.


죄를 지은 인간은 참회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가톨릭의 핵심 신앙이다. 이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생각하고 이를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만들어낸 사람은 단테다. 그의 대표작 ‘신곡’은 ‘천국’과 ‘연옥’, ‘지옥’ 3부로 돼있는데 이중 ‘천국’은 가장 잘 안 읽히는 부분이다. 죄를 짓지 않고 바로 천국으로 가는 인간은 별로 없는데다 내용이 철학적 신학적 문제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이어서 이에 소양이 없는 사람은 읽기 힘들다.

반면 ‘지옥’은 가장 인기 있는 부분으로 3부작 중 가장 많이 팔려 ‘신곡’이 곧 ‘지옥’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단테에 따르면 ‘지옥’은 9개의 서클로 나뉜다. 첫번째 서클에는 예수 탄생 이전에 태어나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어 기독교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도덕적 삶을 산 철학자, 시인, 영웅, 아브라함과 모세 등 유대의 위인들이 살고 있다. 두번째에서 다섯번째까지는 불륜과 식탐, 탐욕과 분노 등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무절제의 죄를 지은 자들, 여섯번째와 일곱번째는 자신과 자연, 신에 대해 폭력을 행사한 자들, 여덟번째와 아홉번째는 사기의 죄를 지은 자들이 영원한 고통 속에 희망 없는 삶을 연명하고 있다.

단테의 지옥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죄질이 나쁘다. 그에 따르면 가장 가벼운 죄가 욕정을 이기지 못한 불륜이고 가장 무거운 죄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악용한 사기다. 사기 중에서도 자신을 믿은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배신이야말로 최악이다. 지옥의 맨 밑바닥에는 창조주를 배신한 악마 루시퍼가 예수를 배신한 유다와 시저를 배반한 브루투스, 카시우스의 머리를 씹고 있다.

지난 주 한국에서 인권 운동가이자 3선 서울 시장이며 잠재적 대권주자인 박원순이 자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박 시장은 여비서가 2017년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텔레그램 등 증거와 함께 고소장을 낸 후 산으로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여성은 박 시장 장례식이 끝난 후 변호사를 통해 박 시장이 자신을 시장 침실에서 성추행했으며 4년간 음란 메시지와 사진을 보내는 등 괴롭혔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가능성은 둘 뿐이다. 하나는 이 여성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원한이 사무쳐 사진과 메시지를 조작한 후 박 시장을 고소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장례식이 끝난 후 허위 사실로 음해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박시장이 이 여성 주장대로 성추행을 한 후 꼼짝할 수 없는 증거가 제시되자 앞으로 닥칠 사태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어느 쪽 가능성이 더 큰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자신의 잘못을 목숨으로 속죄하고자 했다면 이는 잘못을 하고도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것보다는 낫지만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죄를 인정한 후 이 여성에게 사과하고 속죄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용서와 구원을 얻는 길이다.

정의를 외치며 사회의 불의를 바로잡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정작 그 정의의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댈 때 온전한 사람은 별로 없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며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약간 겸손할 필요가 있음을 이번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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