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다리를 전다고 놀림의 대상이었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별로 없어 소위 요즘 말하는 ‘왕따’였다. 내가 나와 만나는 많은 시간을 스스로 위로도 하고 즐겁게 생활하기 위해 늘 명랑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혼자의 시간을 채워나갔다. 공기놀이도 혼자 오른손과 왼손 간의 대결을 하며 놀기도 하고, 줄넘기도 첫판과 두번째 판으로 대결을 하기도 했다.
스스로와의 대결에 익숙해진 나는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보다는 나에게 흥미로운 일에 집중하고 내가 정하는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나와 싸워 결국 이루어내고 마는 성취감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감으로 살고 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접한 영어라는 새로운 외국어는 관심과 흥미로움을 능가하는 두려움으로 다가왔었다. 그래서 영어가 늘 부담이었고 공부하기 싫어하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그래서 전 세계의 각 나라마다 한명씩의 친구를 갖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편지로 친구를 맺는 펜팔 주선 기관에서 가장 읽기 쉽게 예쁘고 또박또박 쓴 편지를 골라 전 세계의 친구를 만들겠다는 꿈을 향해 첫걸음을 떼었다.
처음에는 편지에 많이 쓰이는 한국어 문장과 그 옆에 영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 펜팔의 기초책을 사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편지에 쓰고 싶은 한국말을 생각하고 기초책을 뒤적여 그 말을 영어로 써놓은 문장을 찾아 그리듯이 편지지에 옮겨 적는 방법으로 짜깁기를 해서 첫 편지를 보냈다.
얼마가 지나서 진짜 낯선 외국 우표가 붙여지고 영어로 내 이름과 주소가 쓰인 첫 편지를 받았다.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에서 날아온 신기함에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사전을 찾아가며 알아보느라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렇게 나의 꿈은 미국과 남미, 유럽, 아프리카로 넓혀져 나름 그들의 생각과 문화를 배우며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편지가 오는 나라마다 그 나라의 지리적 위치와 문화에 관한 서적을 읽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특수교사와 사회복지사들의 국제 모임을 통해 뉴욕의 유엔본부를 방문하게 되었다. 세계 60여 개국에서 모인 얼굴도 의복도 피부색도 머리모양도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과 모임을 하게 되었을 때, 그동안 꿈에서만 그려보고 편지를 통해 상상 속에 존재하던 모습이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 너무도 가슴이 벅찼다. 다들 웃고 떠드는 소리에 금세 이미 다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남편이 지참금을 내고 두 번째 부인을 들이려고 해서 속상하다고 고민을 털어놓은 이슬람의 이집트 친구, 까만 얼굴에 부족의 상징이 새겨져있는 나이지리아의 해피 바이러스 떠벌이, 지금은 법적으로 인종차별이 금지되었지만 인종계급 중에 백인다음인 칼러 계급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범생이 아저씨, 그 외에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하니 어디나 사람 사는 모습은 같다는 말이 진짜 진리였다.
장애 때문에 늘 왕따로 살면서 혼자 생각하고 이겨나가는 방법을 터득한 나는 획일적인 집단 사고방식에 쉽게 따르기보다는 좀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친구가 필요했던 나는 사람 중심으로 보기 시작했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문화와 역사를 공부로 이끌어 대학에 다양한 인종의 제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교수가 되어있는 것이었다.
장애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말이 억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 삶에서도 장애가 은혜로 실질적인 열매를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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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 칼스테이트 LA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