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숱한 거짓말과 파산, 여성 편력과 허풍으로 소문난 데다 국제 정세나 국내 현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없는 그가 미국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문제를 “멕시코 강간범”과 중국의 불공정 거래 탓으로 돌린 그의 메시지에 세계화와 자동화로 하류층으로 전락한 백인들은 열광했다. 자신들보다 늦게 미국에 왔으면서 잘 사는 이민자들과 백인이 미국의 중심인줄 모르고 떠들어대는 소수계 엘리트 등 꼴 보기 싫은 집단을 유치원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깔아뭉개는 트럼프야 말로 자신들을 대변해줄 사람으로 보였다.
이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트럼프는 공화당 중진들을 가볍게 물리치고 당내 지명을 따냈다. 거기다 한 표라도 많으면 그 주의 선거인단을 독식하게 돼있는 미국의 선거제도가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시건에서는 1만 표, 펜실베니아에서는 4만 표, 위스콘신에서는 2만 표 등 세 주를 0.2%, 0.7%, 0.8% 차이로 트럼프가 이기는 바람에 이 세 주의 선거인단 46명을 가져갔고 그것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1억3,700만 유효표의 0.06%가 그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전체 유효표에서는 힐러리가 300만 표 차로 이겨 여론조사와 전문가 예측이 틀린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트럼프의 지난 수년은 스캔들의 연속이었다. 마이클 플린 국가 안보 보좌관이 FBI에게 거짓말한 혐의로 임명되자마자 사임했고 선거 전 러시아와의 공모 혐의를 밝히기 위해 특별검사가 임명됐으며 그 결과 전 트럼프 선거 캠페인 의장 등 수많은 인물이 감옥에 갔다.
거기다 그의 개인 변호사인 마이클 플린이 트럼프가 포르노 배우와 플레이보이 모델과 바람을 핀 흔적을 덮기 위해 돈을 준 사실이 드러났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군사 원조의 대가로 정적인 조 바이든 아들 부패 혐의를 수사할 것을 요청했다 연방 하원에서 탄핵까지 당했다.
그러나 이런 추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율은 올 초까지 40%선을 웃돌고 있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경제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초대형 악재가 터졌기 때문이다. 수십년래 최악의 재앙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엄습이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이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면서 사람들의 일상을 마비시키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트럼프는 이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경고한 각종 보고서를 무시하고 걱정할 필요 없다며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약품을 효과가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가 하면 소독약을 몸에 투입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떠드는 등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사람들을 아연케 했다.
이 와중에 터진 조지 플로이드 살인 사건은 트럼프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경찰 폭력으로 희생된 흑인의 죽음을 경찰개혁과 인종갈등 해소의 계기로 삼기는커녕 항의 시위자들을 “폭도”라 부르고 “약탈이 시작되면 발포가 시작된다”는 등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만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보다 트럼프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경제다. 사상 최저의 실업률은 불과 몇 달 사이 대공황 이래 최악의 실업률로 바뀌었다. 경제가 재개되면서 회복세를 보이고는 있으나 대선 전까지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가능성은 낮다. 유권자들은 대선 당시 경제를 대통령의 책임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경제가 좋은데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도, 경제가 나쁜데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도 없다.
최근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열린 트럼프 집회는 그에게 자화자찬과 남 탓하기 말고는 아무런 희망적인 메시지도 없음을 보여줬다. 충성 팬들의 열기로 가득했던 과거 집회와 달리 빈자리가 여기저기 보이고 참석자들도 그의 연설 도중 딴 짓을 하는 등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가 조 바이든에 14% 포인트 뒤진 것으로 나타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2016년부터 올 초까지 운은 트럼프 편이었다. 운이 따라줄 때는 모든 허물이 덮인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변덕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2020년은 미국 역사상 가장 저질스럽고 자격 미달 정치인 한 명이 침몰한 해로 기록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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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