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지금 생각하면 웃음도 나지만 70년대에는 솔직히 과히 불쾌했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국가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 등을 간섭하던 시절이 있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불붙은 나라의 경제는 오늘날 중국이 그래온 것처럼 수년간 세계최고의 성장률로 지구촌을 놀라게 하며 나라 전체가 수천년 내려온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걸음마를 성큼성큼 하고 있을 때였다. 돈암동 산동네 골목에 ‘머리카락이나 베갯속 팔아~요’라는 행상 아줌마들의 귀 익은 장단의 낮은 외침이 들려오면, 동네 아낙들은 미장원 갈 돈을 아끼느라 야매로 손질 받을 때까지 길러두었던 머리를 풀었다. 행상 아줌마의 가위에 맡겨져 숭덩 잘려진 머리카락을 가발제조용으로 팔고 받은 쌈지돈으로 아이들 연필도, 실내화도 사주고 했던 것이다.
당시 국가에서는 한창 일해야 할 젊은이들이 혹시라도 퇴폐와 향락에 빠져 모처럼 불붙은 가난탈출을 위한 대과업에 헌신해야할 국민들의 근로의욕이 행여 식을 새라 경찰력을 동원해 귀 덮은 머리카락과 무릎 위로 짧아진 치마의 길이를 30센치 대자로 재어서는 위반자들을 길옆에 쳐논 새끼줄 안에 뻘쭘히 들어가 있도록 하였다. 퇴폐적이거나 왜색인 가요는 금지곡에 포함시켜 방송국의 전파를 못 타도록 하기도 했다.
십여 마리의 펠리칸들이 흰구름 아래 물위를 떠다니며 잡은 아침 물고기를 부리를 한껏 위로 젖혀 맛나게 먹고 있던 한가한 바다를 따라 이어진 구글 캠퍼스 옆 쇼얼라인 아침 산책길이다. 선곡한 이 노래는 요즘 어찌된 일인지 출연이 뜸한 국악소녀 송소희 버전의 ‘동백 아가씨’이다. 믿을 수 없으리 만치 구성진 국악 천재 소녀의 유튜브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나는 어린 그녀가 ‘내 가슴 도려내는~’ 부분을 열창하는 대목에선 아찔한 소름마저 돋았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이미자 선생님의 원곡으로 다시 틀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며 녹화해 유튜브로 만들어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그새 25명이나 클릭했단다. 애틋하리만치 서정적인 이 노래가 어찌 왜색풍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그 오랜 세월 금지가요의 낙인이 찍혀야 했는지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리둥절하다.
각설하고, 한국인들처럼 흥이 많아 어깨춤이 절로 나는 민족에게 만일 음악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집안에 락다운 돼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요즘의 처량한 우리의 일상은 소살리토에 거주하는 어느 선배님의 말씀대로 벽에다 머리라도 찧고 싶을 정도의 삭막함 그 자체인데,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음악마저 없다면 그 고통은 아마 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 유아기를 막 벗어나 오감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부터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한 즐거운 소리 ‘음악’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선친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 동경에서의 국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현해탄을 건너는 귀국선을 타고 부산으로 돌아와 유엔군 군수관련 사업으로 재산을 키웠다. 얼마 후 김해읍 광대현 고을에 마산 가는 2량짜리 기동차가 멀리 보이고 흐드러지는 진달콤 탱자향기가 그윽했던 마을에 환갑의 할머니 소일거리로 오천평 정도의 전답을 사셨다. 겨우 3살 무렵이었던 나는 초량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할머니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은 채 버스를 타고 농장이 있던 김해로 가서 몇 달씩 머무르기도 했던 것이다.
할머니가 청동 재떨이에 두번 ‘깡깡’ 두드려 비운 곰방대에 쌀 됫박에 가득 담아 논 담뱃닢 가루를 꼭꼭 눌러 채워 넣은 다음 성냥을 통에 붙은 화약 가루판에 ‘치익’ 그어 불을 붙여 담배를 피실 때면 집 뒤 둑길로 엿장수 아저씨가 리듬에 맞춰 가위를 찰캉거리며 지나갔고, 대청마루에 있던 일제 라디오에서는 아름다운 미국 경음악 ‘워싱턴 광장’도 박재란 님의 ‘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하는 가요도 차례로 흘러 나왔다.
이후 부친의 사업 실패로 우리집은 생소한 서울의 돈암동 산동네로 이사를 했고, 나는 윗동네 살던 춘옥이한테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며 실컷 놀림을 받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69년 초딩 4학년이 되자 우리반은 운 좋게도 합주반으로 지정돼 학교에서 제공한 악기로 온 반 아이들이 악기를 하나씩, 나는 멜로디카를 배정받아 몇 달간 음악시간마다 열심히 연습한 뒤에 이웃 동네인 종암동 숭인 국민학교에서 열린 합주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그 후로는 국영수 중점 과목에 밀린 탓에 음악은 영원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2001년 미국행 H1-B 비자를 기다리는 동안 분당에서 꼬맹이들 다니는 피아노 학원을 3개월 다니며 바이엘을 배운 적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내게 그때 중단했던 피아노의 꿈을 다시 이어갈 수 있도록 천금같은 여유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온라인으로 61키 뮤직 키보드를 구입한 나는 거의 매일 밤 미국인 유튜버 여선생님으로부터 근 20년만에 피아노를 무료로 배우는 재미가 보통 쏠쏠한 게 아니다. 이젠 C, D, F, G, Am 등 5가지 기본 코드는 이제 눈감고도 양손으로 누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과연 자가격리 조치가 해제될 7월이 되면 작곡가 포스터의 아름다운 가곡 ‘뷰티플 드리머’를 연주하며 멋지게 노래 부를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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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