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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眞保)를 볼 수 있으려나?

2020-06-10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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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시장경제’ ‘노사공동결정과 공동경영’ ‘질서 자유주의’…. 독일의 어느 정당이 내걸고 있는 기본공약이다. 어떤 당일까? ‘사회적’이니 ‘노사공동결정’ 같은 단어를 보면 진보정당 같지만 놀랍게도 이 공약들은 독일의 현 집권세력이면서 주요 정당들 가운데 가장 보수적이라 일컬어지는 기독민주당(기민당)의 핵심정책이다. 한국이라면 가장 진보적이라 할 정당들조차 유권자들 눈치 살피며 조심스레 꺼낼 이슈들을 독일의 기민당은 기본적인 공약으로 거리낌 없이 내세워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

독일 정당들 간에 이념적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가치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보수적인 기민당과 진보적이라 분류되는 사회민주당(사민당) 간에도 그렇다. 거의 모든 정당들이 복지와 번영, 기회균등, 삶의 질 같은 것들을 공통적으로 내세운다. 이 가치들이 표방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공동체 정신’이다. 이 공동체 정신을 실현하는데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복지다. 복지 문제에 관한한 독일에서는 보수 진보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

보수냐 진보냐를 가르는 기준도 한국과 유럽, 특히 독일의 기준은 다르다. 한국은 70년 넘게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 놓여 있어서인지 특히 진보를 판단할 때 유럽의 보편적 기준보다는 더 왼쪽에 놓고 보려는 경향이 있다. 유럽에서는 중도쯤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과 입장이 한국에서는 급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념의 좌표를 10단계로 나눠본다면 한국의 진보는 유럽보다 2~3칸 더 왼쪽에 놓인다. 진보를 표방하는 한국 집권여당을 독일기준으로 분류하면 보수정당이라 하는 게 옳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의 ‘보수정당’은 진정한 의미의 보수라기보다 극우정당에 가깝다. 입으로는 보수를 외치면서도 구시대적 이데올로기와 교조적 신념에 갇힌 채 반공과 기득권 옹호에만 매몰된 수구적 태도를 고집해왔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가치에는 눈과 귀를 닫고 낡은 질서에 안주하려는 안일함을 보였다. 지난 한국총선 결과는 이런 낡은 보수, 시대착오적 보수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었다.

‘합리적 보수’는 무조건 엣 질서와 가치를 지키려고만 하지 않는다. 속도는 조절하되 필요한 변화는 받아들일 줄 아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다. 이것이 ‘진보’(眞保, 진정한 보수)다. 역사를 살펴보면 복지와 관련한 사회개혁을 보수가 선도했던 사례가 적지 않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럽에서 최초로 포괄적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실시한 사람은 대표적 보수주의자인 독일의 비스마르크였다.

비스마르크는 통일 독일의 경제 불황으로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들이 도산하면서 대량 실업이 발생해 노동자들이 고통을 겪자 의료보험을 비롯한 대규모 사회복지를 도입했다. 그의 이 같은 프로그램은 이후 유럽 각국 사회복지 제도의 전범이 됐다.

그런데 주목해야할 것은 비스마르크의 사회복지가 취약계층을 향한 연민이나 애정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획기적인 복지제도를 추구했던 이유는 당시 독일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던 사회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실용주의적 관점을 지닌 보수 정치지도자였다. 독일 보수정당들의 복지정책 또한 나치문제로 집권가능성이 거의 없는 현실적 장벽을 넘어보겠다는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난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 재건책임을 맡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진취적인” 변화를 내세우며 과거 보수들 입에서는 나올 수 없었던 아이디어들을 던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것은 2022년 대선 승리 가능성이다. 바뀌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는 얘기다. 이런 실용주의적 입장은 그가 독일에서 공부했다는 사실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수구정당의 체질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벌써부터 비판과 볼멘소리들이 슬금슬금 터져 나오고 있다. 과연 한국의 보수에 ‘합리적인’이란 수식어가 붙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보수의 적은 진보가 아니라 수구다.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는 정치시장에서 경쟁하면서 사회발전을 견인해 나가는 라이벌이다. 공동체 유지와 국민들 삶에 안정을 주는 정책을 놓고 경쟁하는 진보(眞保)와 진보(進步)라면 누구를 선택하든 리스크는 크지 않을 것이다. 대선까지 남은 21개월 동안 코로나19가 한국의 정치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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