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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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020-05-28 (목) 나혜경/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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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화, 모양 양, 해 년, 빛날 화.
꽃다운 시절, 꽃다운 나이,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를 뜻한다고도 하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풀이하는 화양연화는 2000년 왕가위 감독 연출에 양조위와 장만옥이 출연한 영화로서 1962년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홍콩사회를 배경으로 두 유명배우의 유명세만으로도 흥행이 보증되었겠지만 그외 배경음악이나 영상미, 의상 등에서도 빼어났다.

2000년도에 왕가위 감독이 그 대단한 영화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양조위와 장만옥 두 배우가 상하이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홍콩의 어느 아파트에서 운명적인 만남의 장면을 만들고 있었을 때, 여주인공 리첸으로 분장한 장만옥이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를 입고 아름다운 곡선의 몸매를 드러내 보이며 우아하고 절제된 슬픔과 이별과 사랑으로 스크린을 가득 메우고 있었을 이십 년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즈음 아마도 우리 부부는 아파트 사무실에서 “성별이 다른 아이가 셋이므로 더 이상 방 두 개짜리 계약을 해줄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망연자실해서 사무실을 나올 때 내 귀에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계신 친정엄마가 새로 시작한 TV 드라마 ‘화양연화’에 푹 빠지셨다. 우리 엄마는 여든 살이 코 앞인데 몸과 마음이 정정하시다. 예나 지금이나 평소에 하시는 일이 많아 TV 드라마에 집중하시는 편이 아닌데 오랜만에 마음이 저릿저릿 흔들리며 보신다고 한다. 극중 남녀 배우의 깊이 있는 연기와 소란스럽지 않게 흘러가는 구성 때문에 볼 맛이 난다신다.“내 평생 사랑이란 걸 해보지 못했잖냐. 보고 있으면 마음이 잔잔하게 여울지는 것 같다.” 라고 하시며 드라마를 보라고 권유하기까지 하신다.
양조위와 장만옥의 화양연화, 유지태와 이보영의 화양연화 못지않게 나의 화양연화 역시 아름다울까?

미국에 온 지 삼십 년 동안 내가 밟은 시간의 궤적을 헤아려 보니 수레바퀴가 구덩이에 빠졌다 나온 듯 짓이겨진 진흙 자국, 돌밭길을 털레털레 달려오기라도 한 듯이 바퀴 표면이 무척이나 닳아져 있는 모양, 바퀴살마다 얽혀 있는 지푸라기 더미로 보아 제대로 달리기나 했을까 싶게 오래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내 시간의 수레바퀴는 너덜너덜해 보인다.
하지만 낡은 시간의 수레바퀴 속 어딘가에는 꽃처럼 아름다운 인생의 한 때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지 않을까?

<나혜경/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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