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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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와 신경통

2020-05-22 (금)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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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상궂은 강도가 잠자던 부부에게 시퍼런 칼을 들이대며 말했다. ‘두 손 바짝 들어. 엉뚱한 짓하면 죽는다.’ 겁에 질린 부부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자세히 보니 남편은 한 손만 들어 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강도는 소리쳤다. ‘내 말이 안 들려. 두 손 다 들란 말이야.’
남편이 말했다. ‘오른쪽 어깨가 신경통입니다. 심합니다. 치켜 올릴 수가 없습니다. 살려주세요.’ 갑자기 강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신경통이라고 했소? 아픈지 얼마나 되었소? 무척 아프지요?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

강도는 자신이 강도라는 사실을 깜박 잊었다. 집 주인과 함께 신경통 증세에 대하여, 아픔에 대하여, 치료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대화가 점점 깊어가자 방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강도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 바란다.’는 공감의 말을 남기고 그 집을 떠났다.“(오 헨리의 단편 ‘강도와 신경통’ 중에서)

공감(empathy)의 힘은 놀랍다. 아픔과 고난을 함께 공유하며 공감할 때 강도는 더 이상 강도가 아니다. 집 주인도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힌 피해자가 아니다. 공감대 안에서 서로는 가까운 친구이며 한 가족이다.


유대 신비주의 신학자 마틴 부버는 높은 수준의 공감이 이루어지는 관계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라고 했다. 다니얼 골만은 ‘높은 SQ(사회지능지수)’라고 했다. 예수는 ‘나의 친구’, ‘나의 가족’이라고 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공감은 일어난다.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으려면 자신을 잠시 잊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잊고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다가 갈 때, 나의 공감의 언행이 고통당한 사람을 치유하고 좌절한 사람을 일으킨다.

로버트 레슬리는 말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을 거부한 것과는 달리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을 거부하지 않았다. 세상은 이 여인을 원 밖으로 내몰았지만, 예수는 이 여인이 원(圓)안으로 넉넉히 들어올 수 있도록 더 큰 원을 그려놓았다. 이것이 예수 공감력의 비밀이다.”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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