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주말 ‘현관 콘서트’ 한인 변호사 화제” 4월24일자 미주 한국일보, 코로나 바이러스 기사들로 뒤덮인 신문에서 선명하게 눈에 띄는 타이틀이었다.
나는 일단 신문을 큰 글자만 대충 읽고 커피와 토스트 한 쪽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한 후 마음에 끌렸던 제목으로 되돌아가 자세히 읽는다. 사회면과 경제면에 먼저 눈이 가서 읽게 되고 다음으로 오피니언으로 넘어간다. 이 면은 시론, 데스크 창. 뉴스칼럼, 삶과 문화 등등 읽을거리가 너무 많아 아침시간을 많이 할애하곤 한다. 요즘 같은 때는 더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매 주말 ‘현관 콘서트 한인 변호사 화제” 기사로 다시 갔을 때 ‘첼리스트 김병수 변호사 커플’이란 부제가 눈에 띄었다.
“엉! 이 사진, 병수 아냐?” 남편이 신문을 가로 채 보더니 깜짝 놀란다. “맞는데? 별로 변하지 않았는데…” “어마나, 병수 맞네! 어려서부터 첼로를 했지. 변호사잖아. 지금 아마 사십이 훨씬 넘었을 걸?” “공부를 엄청 잘해 하버드 가지 않았어?” “어려서부터 말이 별로 없고 애 같지 않아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지. 그때, 자기 엄마 장례식 때도 첼로로 ‘솔베이지의 노래’를 연주해서 모든 조문객을 울리더니… 벌써 이십여 년이 훨씬 넘었네.”
친구는 병수가 동부에서 대학에 다닐 때 혼자 암 투병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을 때였다. 힘든 내색 한번 안하고 잘 견뎌냈는데 결국엔 떠나고 만 친구. 온 정성을 들여 아들을 잘 키워놓고 겨우 50을 넘긴 짧은 삶을 살고 갔기에 아들의 성공을 누려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간 친구와의 추억이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친구와 병수, 나 셋이서 LA 뮤직센터에 갔다. 나는 시즌 티켓을 사서 갈 정도의 클래식 팬은 아니었지만 친구는 시즌 티켓을 사서 아들을 데리고 가곤했다. 그때 병수는 아마 중학생이었던가. 나는 가끔 땜빵으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덕을 봤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나는 낮에 바쁘게 지내 무척 피곤했고, 오케스트라 연주는 잠을 재우듯 조용하니 졸음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조는데 갑자기 고개가 확 꺾여 깜짝 놀라 다시 정신을 차리고 듣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고개가 떨어졌다. 들키지 않으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죽을 것 같은 고역이었다. 오케스트라고 뭐고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마음뿐이었다. 아! 드디어 살았다.
“아이참! 해도 너무 해! 아니, 왜 그렇게 조는 거야? 아주 고개를 떨어트리고… 왼쪽에서는 병수, 너는 아주 코를 골며 자고 있더라니까? 아이, 창피해!”
그때의 병수가 잘 자라서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우울한 이때에 토요일 아침 현관 앞에서 첼로를 연주하며 이웃을 위로한다는 기사… 주말 아침이면 언제나 첼로 연주가 흘러나오고 주위에는 유모차를 끈 젊은 부부, 머그잔을 들고 서있는 나이 든 부부, 모두가 미소를 띠고 연주를 들으며 위로를 받는다니…
병수를 만나고 싶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위로해주는 병수에게 엄마 대신 등이라도 토닥거려 주고 싶다. 아니면 먼발치에 서서라도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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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금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