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의 관심과 사랑을 더욱 다지는 5월 가정의 달에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자택 대피령 속에서 우리는 새삼 가족애와 인류애 그리고 나아가 자연애(自然愛)를 깊이 더욱 절실히 느낄 일이다.
빛과 소리에 매료되었었던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편지문구를 인용, 영국의 인기 여류작가 안토니아 수잔 바이어트(1936~ )는 1993년에 나온 ‘마음의 열정(Passions of the Mind)’이란 수상록에서 사색의 계절에 명상과 상념의 시간 속으로 아래와 같이 산책한다.
“나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 안 하려고 자연을 주시(注視) 관찰한다. 얼토당토아니하게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다. 내가 칠하는 색깔이 자연의 빛깔에 일치 부합하는가 보다는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것처럼 내 화폭에 나타나는 그대로 아름다운가. 이것이 내 관심사다.”
태국 타일랜드에서는 승려들이 사람이 죽은 시체가 썩어 가는 사진을 보면서 자신들의 육체도 매한가지임을 심시 숙고한단다. 부처 자신이 ‘시체 명상(corps meditation)’을 제자들에게 권했다고 한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다 조만간 죽는다는 게 기정사실이라면 이 엄연한 사실을 잊고 살기보다 언제나 절감하면서 한시도 허송세월 할 수 없는 일이어라.
이 해가, 이 달이, 이 날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이렇게 죽음을 의식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우울해지거나 심각해지기보다 외려 더 명랑하고 경쾌해진다는 사실을 밝힌 논문이 최근 발표되기도 했다.
우리 삶 자체가 꿈꾸듯 하는 환상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무슨 꿈이면 어떠랴. 사람마다 저마다 제가 꾸고 싶은 꿈을 꾸는 데는 그 어떤 아무런 제약도 있을 수 없으리라.
어젯밤 한 친구가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의 편지’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중략)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에미를 용서하거라. (중략)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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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상/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