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요즘처럼 불확실한 시대에 10년 장기리스를 줄 수는 없네요. 길어야 3년입니다”
이태리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대량 감염 및 사망사태가 빚어지면서 이웃나라 스페인도 뒤이어 감염이 확산일로에 있던 지난 2월말, 나는 공교롭게도 2명의 이탈리언 파트너와 함께 지근거리에서 한동안 일을 해야 했다.
40대 초반인 알프레도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세계적인 관광지 ‘람블라’ 거리에서 최고의 이태리식당으로 평가받은 바 있는 유명 식당을 10년째 운영 중인 셰프 레스토런터이다.
유명한 가우디 성당이 있는 곳이고, 발롱도르상 6회 수상에 빛나는 축구스타 메시가 뛰고 있는 바르셀로나 FC 팀의 홈구장이 있는 곳이기도 해 주말이면 화려한 메시의 발재간을 보러 경기장에도 가끔 간다 하여 나의 큰 부러움을 샀다.
그런 그가 나와 한 사무실을 공유하고 있는 버클리 MBA 출신의 영민한 투자가이며 같은 이탈리언인 루이지와 파트너가 돼 실리콘밸리의 명소인 스탠퍼드 정문 앞 팔로알토 다운타운에 2호점을 개설하는 프로젝트를 도와달라고 하여 한동안 함께 일을 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다른 유명 지역은 일찌감치 접고 꼭 여기서만 하길 원한다 하여 피차 시간낭비 없이 후보지를 집약해 장소 물색에 피치를 올렸는데 그만 마의 SIP, ‘셸터 인 플레이스’ 명령이 떨어지면서 모든 것이 ‘동작 그만’ 상태가 돼버렸던 것이다.
맥 빠진 알프레도는 기약없이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면서 내가 추천한 곳 중의 한군데 마음에 정해둔 곳의 리스를 알아봐달라 했고, 그동안 두달째 속 터지게 회신 늦은 미국인 건물주와 협상을 해왔으나 씁쓸하게도 오늘 최종 불가 회신을 받은 것이었다.
유럽에서도 코로나의 감염 확산세가 가장 심각하다는 이태리와 스페인 두나라를 연고로 둔 비즈니스맨들과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 처음에는 얄궂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물쭈물 꺼리면서 상담할 수는 없는 일. 나는 모든 걸 운에 맡기며 마스크도 없이 미팅도 자주 하고 맛난 이태리 피자에 맥주를 곁들이며 우의도 쌓으면서 조카뻘 그 친구들과 함께 정말 열심히 일했음에도 이리 아쉽게 된 것이다.
조만간 자택격리명령이 풀리고 비즈니스가 재가동되면 주상복합으로 재개발하거나 그럴 계획이 있는 바이어에게 높은 가격으로 팔고 싶은 건물주 입장에서는 제아무리 국제적으로 이름난 레스토랑 2호점을 오픈한다고 해도 10년이라는 장기계약으로 묶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근사한 식당을 오픈하려는 이들 파트너 입장에서는 초기 투자가 만만치 않은데 최소 10년 리스가 보장되지 않으면 시작하기 어렵다는 데에 피차 구조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온 세상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꽁꽁 얼어붙어있는 것 같지만 이렇듯 엄동설한 시내의 두꺼운 어름장 밑에서도 고기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일은 조금씩 조금씩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엔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기술 특허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세계적 기업인 램버스(RAMBUS)에 다니는 중국인 엔지니어와 함께 집 근처 바닷가로 13킬로 산책을 나갔다. 경제불황 스트레스 지수가 극도로 높은 이 마당에 한국의 자랑인 삼성전자는 얼마전 월가의 1분기 수익 예상치를 달성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발표하여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친구가 일하고 있는 램버스도 회사의 두 주요고객인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의 선전으로 대만의 세계 제1의 파운드리 회사인 TSMC가 생산해 이들에게 공급하는 메모리 반도체 관련 칩 주문량이 별 영향을 받지 않아 다행이라는 사내 분위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코로나 재택명령 3개월로 접어들면서 언제 바이러스가 내 몸에 우겨 들어올지 몰라 불안한 마음을 빼고 나면 의외로 나는 한결 강건해진 느낌이다. 일이 거의 없어 지갑은 얇아졌지만 업무 부담도 함께 줄었고, 새벽운동 하러 갈 짐도 문 닫은 지 오래라 바지런 떨일 없는 나는 늦게까지 정말 푸욱 잔다. 거의 중천에 뜬 햇살이 눈을 마구 찌르는 8시면 일어나 샤워하고, 완전히 쪼그려 앉는 딥 스쿼트 스물, 푸시업 서른개로 아침 체력을 다진 뒤 맥도널드 커브사이드에서 주차한 차창을 통해 커피를 받는다. 그리고 고요한 바닷길을 걷고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SBA 긴급자금 신청한 것은 언제 나오나 조회도 하고 좋아하는 가요를 따라 부르며 노래방 놀이도, SNS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해질녘이 되면 또 다시 집을 나서 이번에는 동네를 아주 멀리까지 산책해 하루 만사천보를 채운다.
모처럼 거울을 쳐다본다. 처음 보는 웬 장발의 홀아비가 우두커니 서서 내게 말을 건넨다. 코스코 옆 리사 아줌마네 월남 미용실에 가야하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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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