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0일간의 ‘돌발잠적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은 엉뚱하게도 북한 땅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태영호, 지성호 씨다. 두 사람이 말실수(?) 때문에 권력이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망측스러운 해프닝 아닌가.
권력을 세습받은 김정은과 그 여동생이 북한 전역에서 모인 인민대의원 대회를 갑자기 이틀이나 연장하고 태양절(김일성 생일) 참배를 예고 없이 걸렀으니 관련국들의 비상한 관심을 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특이한 사건을 놓고 한국 정부는 “이상 동향이 없다”고 강조하는 가운데 미 CNN을 비롯한 세계 각국 언론들은 스모크 아웃(Smoke Out)을 시작했다.
스모크 아웃은 위험을 느낀 곰 따위의 짐승들이 굴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면 연기를 불어넣어 튀어나오게 하는 수법이다. 김정은이 행방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자 각 언론들은 스쿱(Scoop) 본능(단독 특종기사)까지 작동하여 더욱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런 와중에 김정은 사망설, 위독설, 코로나19 도피설 심지어 내란설, 후계자 추측까지도 보도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미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김정은의 근황에 자신 있는 언급을 보류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찌해서 태영호, 지성호 두 탈북 신인 정치인 기자회견 내용이 “근거도 없이 사망설, 위독설을 주장했다”라며 여권의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는건지 납득이 잘 안된다. 이들이 북한을 떠난 지 오래 되었다고는 하나 태영호 씨는 바로 얼마 전까지 북한의 주요 상대국 영국 주재공사로 근무했던 장본인이다.
특히 미, 일 언론들이 이 두 사람을 회견 대상으로 꼽아 김정은의 행방이나 건강상태 등을 물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느낌대로 김정은이 사망했을 수도 위독한 상태일수도 있다고 단언했는데 이 판단이 격렬한 비판을 받다니 무슨 영문인지 이해가 어렵다. 이들의 회견 내용이 국민을 선동하고 불안을 야기시키고 지나쳤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추측을 남발한 미국, 일본 언론이나 관리들에게 먼저 항의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태영호, 지성호 씨는 외신들에게 자진해서 공식 논평이나 성명 발표를 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기자들의 질문에 의견을 피력했을 뿐이다. 다른 정치인의 회견이나 발표 내용을 외면하고 이들에게만 근거 없이 지나친 발언을 했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왠지 표적 공세로만 보인다. 엄혹한 폐쇄사회인 북한 문제 논평에 근거를 대라니 왜들 이렇게 흥분하는 건지 속내를 모르겠다.
두사람은 이번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북한 현장 감각을 충분히 체득하고 속속들이 내막을 파악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따라서 대북정책 수립이나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갖춰주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심지어 두 사람의 간첩활동까지도 의심한다는데 이렇게까지 소인배 같은 치졸한 학대 모략까지 하다니 유감이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하던 시절 중도파 군벌 장쭤린, 장학량 부자가 회담에 참석했던 장개석을 체포해 모택동에 바친 사례가 있었다.(1936년 서안사건) 모택동은 장개석을 즉시 풀어 주었다. 국민당과 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제압하고 나서 대륙을 석권하자는 속셈이었고 그 책략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우리도 태영호, 지성호 같은 탈북자들을 통 큰 아량으로 대하고 슬기와 지혜를 모아 화합해가는 덕을 베풀며 멀리 내다보는 정치를 충고하고 싶다.
김정은이 나타난 지 이틀 만에 북한은 비무장지대 초소에 기관포 총격을 가해왔다. 우리 국방부는 해명을 요구하는 전통문을 보내고 나서 북측의 해답을 듣기도 전에 ‘우발적 사건’이라고 서둘러 감싸기에 급급한 듯한 논평을 냈다. 북조선 언론매체 ‘메아리’는 “남조선 보수 세력들이 가짜뉴스를 늘어놓아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다”며 비아냥거렸다. 태영호, 지성호 두 사람을 더욱 궁지에 빠뜨리려는 선동이다.
아마 김정은은 지금쯤 20일간의 잠적으로 인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는 심리전에 승리했다며 한껏 자축하고 있을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가능한 한 북측과의 충돌을 피해 가려는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지나친 양보와 미소 전술은 순식간에 휩쓸려버리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여야를 떠나 태영호, 지성호 두 당선자는 우리 정치계가 잘 보호해야 한다. 현재 남북관계는 꽉 막혀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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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