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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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인사

2020-05-09 (토)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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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을 그렇게 속절없이 보내고 큰 기대없이 5월을 맞습니다. 하늘은 푸르렀으나 그 하늘 아래의 거리는 여전히 텅 비어 있습니다. 눈부신 봄날의 인사는 그래서 더 서럽습니다. 잘 지내라는 기약을 알 수 없는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그래도 짧은 위로의 말 한 마디가 이 참담한 시절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다시 한 달을 세어가며 견디는 요즈음입니다.

어제는 넷플렉스에 접속해 영화 몇 편을 기웃거리다 자정을 훌쩍 넘겼습니다. 약간의 허기를 느끼며 군만두와 라면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 와인을 꺼내 아내가 아끼는 크리스탈 잔을 꺼내 조심스럽게 붉은 와인을 반쯤 채웠습니다. 늘 마시던 와인인데도 크리스탈 잔에 담긴 와인의 맛은 품격마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풍경처럼 스칩니다. 뜰 한 모퉁이에 피는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쓰고, 사람이 그립다고 읽습니다.

돌아보니 참 바쁘게 살았습니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여행은 일탈이었고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하여 예전 같으면 지금쯤 다른 여행을 계획하며 조금은 들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과 몇 달 전에 다녀온 여행 사진 속에서 아이들과 내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조금은 낯설고, 더 많이는 그리운 풍경입니다. 창 너머로는 계절이 바뀌고, 빈 가지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루가 다르게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번거롭다고 여기던 관계와 일상의 일들이 새삼 고맙습니다.


집안에서만 머물기가 일상이 되었어도 화창한 주말은 더 답답함을 느낍니다. 집 근처 바닷가 공원이 열려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바닷가를 서성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끔씩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와 나란히 모래밭을 터벅터벅 걸으며 눈부신 햇살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누군가가 걸어옵니다. 그들도 우리를 보았는지 작은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도 본능적으로 마스크를 꺼내 들었습니다. 입을 가리니 상대방 표정을 읽기가 어렵습니다. 눈으로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서로 비켜 지나갔습니다. 불과 두어 달 전에만 해도 마스크를 썼다는 이유로, 또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시안이 폭행당했다는 어이없는 뉴스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맞고 그때가 틀렸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쯤에서부터 길을 잃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힘든 시간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습니다. 화사한 봄볕 아래 서로 웃으며 마주 설 날을 기대해 보지만 아직은 서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격리하고 있습니다. 강물이 그 흐름을 멈추지 않았고, 꽃은 자신의 계절을 알아 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산으로 새들이 모여들었고 새들이 옮겨간 자리마다 어린 새 순이 잎을 내밀며 봄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눈부신 봄날의 오후는 먼지가 나는 길을 따라 귀환하는 패전국 병사의 발걸음처럼 조금은 쓸쓸하고 지쳐있습니다.

가끔은 외롭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지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시계태엽을 감듯 느슨해진 일상을 당겨 감으며 산책에 나서기도 합니다. 어차피 걷기의 절반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어서 낯선 곳에서도 돌아오는 길은 제법 익숙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농도에 따라 변하는 풍경이 늘 새롭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억지로 멈춰 선 일상에서 최대한 단순해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에 무릎을 꿇고 순응합니다. 다행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바쁘다고 소홀히 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한 줄이 유리창에 박히는 날입니다.

그리움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안부를 묻게 한다./중략/ 안부가 궁금한 것인지/ 안부를 전하고 싶은지/문득문득/잘 지내고 있어요?/묻고 싶다가/잘 지내고 있어요./전하고 싶다./ 목필균 시인의 노래를 빌어 그렇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대, 잘 지내고 있어요?

<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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