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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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기차여행

2020-05-02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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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신문을 가져오려고 현관문을 여는데 기차 소리가 밀고 들어온다. 기적 소리에, 바람이 차가운 줄도 모르고 서 있다. 이맘때면 늘 듣는 소리인데 마치 오늘이 처음인 듯 새삼스럽다. 열린 현관문에 기대어 선 채 꿈인 양 들려오는 기차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마음은 먼 과거로 달려간다.

겨울에 장거리 출근을 하려면 전쟁이 따로 없었다. 집에서부터 마을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내려와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일부터가 고역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언제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렸다.

한겨울에 한데서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더디 가던가. 만원 버스에 겨우 비집고 올라타면 안경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언 몸이 녹으면서 근질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웬 음악은 그리도 크게 틀어놓는지. 쿵작거리는 유행가 소리가 공기를 휘젓고 다니면 내 심장도 따라서 쿵쿵 울렸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노래가사는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구슬프고 청승맞은지, 가벼워야 할 아침 시간에 한숨을 내쉬며 앉아있었다.


그렇게 기차역까지 갔다. 열차 시각에 맞게 도착해야 할 텐데 싶어 역에 가까워질수록 음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충분히 시간을 남겨놓고 버스를 타는데도 배차 시간을 맞춘다는 이유로 번번이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어찌 됐든 기차만 타면 제시간에 내려줄 테니 그때부터는 온전한 내 시간이고 내 세상이었다. 승객이 거의 없는 기차는 간헐적으로 철커덕 소리만 낼 뿐 조용했다. 몸도 마음도 바쁜 세월을 살며 아침결에 주어진 고요한 공간과 오붓한 시간은 놓기 어려운 매력이었다. 단조로우면서도 리드미컬한 기차 소리는 버스에서 지친 몸을 차분하게 진정시켜주었고, 기차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산과 구름과 나무는 산만하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렇게 주어진 기차와의 시간 여행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하루도 같은 그림을 보여주는 일이 없는 유리창 풍경화. 그 그림은 내게 계절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있더냐고 묻곤 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면 누추한 삶도 미화될 수 있다고 일러주던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관계에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때로는 기차역 주변 궁핍한 삶의 현장을 보면서 버스를 울리던 대중가요 가사를 떠올렸고,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답도 없는 질문을 되풀이했다. 내가 너무 생각 속에 함몰되었다 싶으면 기차는 가끔 기적소리를 내어 환기시키는 일을 잊지 않았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달려왔을 시간의 열차. 기차가 굽은 길을 돌 때는 멀리 창밖으로 꼬리 부분이 보였다. 저 칸에 실려서 따라오고 있을 나의 과거는 좋든 싫든 함께 하던 시간이었고, 변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나만의 시간이었다.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자각하며 현재 앉아있는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도 했고, 앞서 달리고 있는 미래가 궁금해서 고개를 길게 빼고 기차 머리를 내다보기도 했다. 그때쯤이면 은퇴 후의 여유로운 생을 즐기고 있으리라는 긍정적이고도 낙관적인 상상을 하자 어서 앞 칸으로 옮겨 타고 싶기도 했다. 앞 칸엔들 좋은 시간만 실렸을까마는, 그런 환상마저 없었더라면 사는 일이 얼마나 팍팍했을까.

기차는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새벽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칭얼거리는 아이를 떨쳐두고 눈물 바람을 하고 집을 나서는 일이 일상이던 출근길. 한때 버겁게 느껴지던 젊음이지만, 치열한 삶의 기차 칸에 탔던 그때가 봄날의 꿈만 같다. 이제 지나간 시간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데는, 기차 안에서 밖을 내다볼 때처럼 세상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이겠지.

기차에 같이 탔다가 어느 역에선가 내린 사람들이 보인다.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되돌려 보고픈 풍경도 많다. 오랫동안, 혹은 얼마 전부터 함께 탄 사람들을 싣고 여전히 달리고 있는 시간의 기차가 고맙다. 기적이 울린다. 지금 같은 칸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주라는 의미 같다. 내 앞뒤로 여러 객실을 매단 채 달리는 기차, 저만치 앞에 있는 칸에 타게 되면 지금의 젊지 않은 시간마저 그리워지리라.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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