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코로나로 도배된 듯 하다. TV를 켜도 라디오를 틀어도 온통 코로나, 코로나에 집중된 뉴스들 뿐이다. 공연도 없고 전시회장도 폐쇄됐다. 스포츠 경기들도 이미 예전에 접었고 들려오는 얘기라곤 회색경보, 집에 있으라는 것과 바깥출입에 대한 경계 뿐이다. 세상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두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짜증을 부려봤자 받아 줄 사람도 없다. 집 안에만 있으려니 불안감만 늘어간다. 소일거리를 찾아 TV를 켠다. 책을 펼쳐본다. 그러나 리듬이 깨지니 어느 것 하나 집중이 되는 것이 없다. 이런 적이 전에도 또 있었나? 과거를 더듬어 봐도 도무지 기억나는 것이 없다. 아마 이런 일은 생전 처음 겪는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회복기를 보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사회가 온전히 돌아 갈 때였고 지금처럼 깜깜이 시절은 아니었다. 그때는 가족들의 온기, 세상이 전하는 활기 때문에 지금 처럼 불안에 떨거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전쟁을 겪어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전시 상황이 이러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뭐가뭔지 모르게 하루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신문에도 뭔가 쓰긴 써야 할 텐데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문화도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문화다. 전시 상황에서는 제일 궁핍한 자들이 아마 음악가들, 공연 예술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한다. 내일은 나아질 수 있을까?
지난 주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16세 소년의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소년 특유의 낙관론으로 가득한 글인데, 제목은 ‘내일은 나아질 거야(Tomorrow Will Be A Better Day)’였다. 2018년 10월에 쓰여진 글이었는데 그 때 이미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COVID-19같은 사태를 예감했음인지 글은 팬데믹 등에 대한 소년의 의견들이 점철되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16세 된 소년은 ‘주말을 어떻게 지내야할까?’ 하는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리빙 룸에서 들려오는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자신에 대한 걱정거리였는데 그것이 일반적인 걱정이 아니어서 조금 충격을 받게 된다. 즉 아들을 어느 대학에 보내야 할까, 학비는 얼마나 들게 될까 등 일반적인 화제가 아니라 아들이 살게 될 세상에 대한 걱정거리였다.
아들에게 시급한 문제는 ‘아들이 어느 대학을 가느냐’ 보다 아들이 살게 될 세상이라는 것이었다. 부모님들의 말씀인즉 팬데믹으로 밀리언 이상이 죽게될 거라는 예견 그리고 에너지 위기, 끔찍한 경제 불황, 핵폭발 등이 예견된다는 것이었다. 에세이의 결론은, 자신이 좋지않은 일을 겪을 때마다 아빠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내일이면 나아질 거야’하며 위로하던 말을 상기하는 것으로서, 이번에는 소년이 반대로 아빠의 어깨에 손을 얹고 “Don’t worry Dad, tomorrow will be a better day.” 하며 위로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끝맺게 된다.
월드 팬데믹이라하지만 이번 일로 인류가 종말을 고하리라 예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소년처럼 과거 그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위의 할아버지들이 그랬듯, 수많은 전쟁을 겪어왔고, 전염병, 에이즈 같은 강적을 이겨온 인류가 이번에도 결코 만만히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생각들이 강하다. 그러나 심장 쇼크는 아닐지 모르지만 인체의 뇌는 작은 혈관 출혈 하나만으로도 한 생명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이번 일로 세계가 다시 지역주의, 방어주위, 국수주의로 빠지리라는 염려도 있다. 과거 인류는 중세에도 흑사병같은 전염병을 겪으며 종교개혁, 과학혁명같은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허무주의, 물질주의, 이성만능주의로 인간의 감성을 피폐시켰고 지구를 오염시켜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태 그 자체보다는 어쩌면 가능성에 대한 작은 불안일지도 모른다. 이번 일로 ‘코로나’라는 가랑비가 일부나마 우리들의 사고에 부정적으로 젖어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 우리가 만들어 온 세상이 다음 세대에게 고통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노파심, 자책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싸워왔던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등이 겪어왔던 질병과의 투쟁, 에이즈의 극복, 인권 개선 등 새로운 세상이 다음 세대에도 계속 펼쳐지리라는 기대감은 어디까지나 다음 세대의 몫일 뿐이다.
10년 후에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물론 10년은커녕 내일 일도 장담할 수 없는 우리지만 지금은 오히려 This, I believe, Tomorrow will be a better day… 각자 희망의 설계가 필요한 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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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