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7년부터 6년간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재앙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럽 인구의 1/3에 달하는 2,5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금과 비교하면 의학지식이 전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당시 유럽인들에게 흑사병은 신의 징벌로 밖에 볼 수 없었다.
절대 다수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믿던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유럽을 찾아온 이 병은 또 그렇게 사라졌다. 전염병의 특징은 더 이상 전염시킬 사람이 없으면 소멸하는 것이다. 두 집 건너 한 집이 비고 경제활동이 마비되면서 자연스럽게 자가 격리가 이뤄졌다. 또 질병에 취약한 노약자가 모두 사망하고 저항력이 있는 강한 체질만 살아남으면서 쥐벼룩 몸 안에 살고 있던 병원체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박테리아가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어진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지금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기는 했으나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농지는 남아도는데 일손이 부족하자 살아남은 사람들의 몸값은 올랐다. 흑사병 이전 중세 유럽인구의 90% 이상은 땅에 묶여 평생을 태어난 곳에 살다 죽어야 하는 농노였다. 노예처럼 사고 팔리지는 않았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도, 직업 선택의 자유도 없이 영주가 세금을 내라면 내고 부역을 하라면 해야 하는 힘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노동력이 급감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영주들이 농부들을 끌어가기 위해 온갖 특혜를 주기 시작했다. 세금과 부역을 줄이고 타 지역에 사는 농부들을 스카우트 해왔다. 농노들은 더 이상 땅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영주와 협상을 하는 계약 노동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1,000년 간 중세의 경제기반이었던 농노제는 이렇게 무너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각종 노동절약 기구가 개발됐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 방아를 찧는 풍차가 급속히 늘어나고 말 멍에와 편자, 철제 쟁기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됐다.
또 질병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전염병의 창궐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염자를 격리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영어로 ‘격리수용’을 뜻하는 ‘quarantine’은 ‘40’을 뜻하는 이탈리아 어 ‘quarantena’에서 왔다. 14세기 후반 베네치아가 40일 동안 감염자들을 처음으로 격리 수용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40이라는 숫자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고 예수가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한데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유럽 각국 정부에 보건국이라는 기관이 생긴 것도 이 때부터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과거 전통과 권위, 신앙이 최고의 가치였다면 이제는 실용과 실험, 이성이 지도 원리로 떠올랐다. 과거의 권위와 교회의 신앙이 흑사병 앞에 무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15세기의 르네상스와 16세기의 과학혁명과 상업혁명 모두 이런 가치체계 혁명의 바탕 위에 이뤄졌다.
이런 사실을 돌이켜 보면 흑사병이 가져온 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중세라는 한 시대의 끝이었을 뿐이다. 그 후 인류는 그때와 비교도 안 되는 지식과 부를 쌓으며 훨씬 더 풍요롭고 자유로우며 건강한 세계를 건설했다.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 코로나 사태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며 그 뒤에는 대공황을 능가하는 불황이 찾아올뿐더러 그 불황은 언제까지나 회복되지 않을 것이란 괴담이 판을 치고 있다. 모두 근거 없는 낭설이다.
워싱턴대 보건수치 연구소는 미국 내 코로나 사망자 수는 4월 15일 정점을 기록한 후 계속 줄어 6월 말 사실상 사라질 것이며 누적 총 사망자는 9만 4,000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미 전체 인구의 0.03%에 달하는 수치다.
중세 유럽이 전체 인구의 33%를 잃고도 살아남아 더 나은 사회를 건설했는데 미국이 0.03%의 희생을 딛고 일어서 재기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세상 어떤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끝나지 않는 것은 없다. 조심은 하되 과장된 호들갑에 겁먹지 말고 꿋꿋이 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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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