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이러스와의 전쟁

2020-03-24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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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라틴어로 ‘독약’이라는 뜻이다. 한번 걸리면 독약을 먹은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바이러스는 특이한 존재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명체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신진대사를 하지만 바이러스는 그렇지 않다. 오직 유전자와 이를 감싸는 단백질(드물게 지방)로만 돼있고 숙주 밖에 있을 때는 전혀 활동이 없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다 숙주 안으로 들어오면 숙주의 세포를 이용해 번식활동을 한다. 일부 바이러스는 수 만년 동안 빙하 속에 숨어 있다 숙주를 만나면 살아 움직인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를 생명체와 비생명체 중간 단계에 있는 존재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문제는 이 바이러스가 숙주 안에서 왕성하게 자기 복제를 하면서 숙주의 신체기능을 저해하거나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이다. 20세기 초까지 인류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천연두는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대표적 질병이다. 이 병은 한번 걸리면 치료가 불가능하고 낫더라도 얼굴이 곰보가 돼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20세기에만도 이 병으로 죽은 사람 수는 3억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천형으로 알고 살아야 하는 줄 알았던 이 병의 해결책은 뜻밖에 영국의 우유 짜는 처자들에게서 나왔다. 에드워드 제너라는 의사가 아무리 마을에 이 병이 돌더라도 우유 짜는 아가씨들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천연두와 증상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약한 소의 우두 고름에 접촉하면서 면역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를 이용해 1796년 백신을 만들어냈다. (‘백신’이라는 말 자체가 라틴어로 ‘소’라는 뜻이다.)

당시 영국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이 백신의 효력에 크게 감탄하고 전 프랑스 장병에 접종을 의무화했으며 제너를 “인류 최대 은인의 하나”라 부르고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가 요구한대로 영국군 포로를 석방해줬다.

제너가 개발한 백신은 점차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세계보건기구는 1980년 천연두 바이러스의 멸종을 선언했다. 인류가 바이러스와 싸워 얻은 위대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중반 미국인들을 가장 공포에 빠뜨린 질병은 소아마비다. 이 병도 한번 걸리면 치료가 불가능한데다 살아남아도 불구가 되기 일쑤였다. ‘소아마비’란 이름이 말해주듯 어린아이들이 주로 걸리고 평생을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병은 주기적으로 전국을 휩쓸었는데 1952년 한 해에만 5만8,000명이 감염돼 3,100명이 죽고 2만1,000명이 불구가 됐다. 당시 미국인들이 핵전쟁을 제외하고는 소아마비를 가장 두려워 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더 이상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가만 놔둘 수 없다는 공감대가 미 국민 사이에 폭넓게 일었고 그 선봉에 조나스 솔크라는 병리학자가 섰다. 마침내 솔크는 1955년 백신 개발에 성공했고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인 2만 명의 의사와 20만 명의 자원봉사자, 180만 명의 아동이 백신 개발과 시험 투약에 참여했다.

이 백신의 효력이 입증되면서 솔크는 일약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 백신에 특허권을 설정했을 때 그 가치는 7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지만 그는 “태양에 특허를 설정할 수 있는가”는 말과 함께 이를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한 한 푼의 경제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

이 백신이 널리 퍼지면서 1988년까지도 35만에 달하던 자연발생 소아마비 환자 수는 2018년 33건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국한돼 있다. 소아마비도 천연두와 함께 지구상에서 살아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봐도 된다.

지난 200년간 바이러스와의 전쟁사를 돌이켜 보면 쉬운 싸움은 아니지만 결국 인간은 한 때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무서운 질병들을 차곡차곡 퇴치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수많은 의학자들의 헌신과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의 공포에 떨고 있다. 경시할 일은 아니지만 과거 인류가 겪었던 악성 역질에 비하면 이번 것은 정도가 약한 편이다. 시간은 걸리더라도 반드시 이번 위기를 이겨낼 것으로 믿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겠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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