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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센추리 인스티튜트

2020-03-13 (금)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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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는 서로 잘 몰랐다. 20세기에는 만났다, 때로 폭력적으로. 그러나 21세기를 기록할 때는 서로를 알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다가섰다고 쓰여질 것이다.’

3세기에 걸친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국제관계가 이렇게 간추려져있었다. 얼마 전 한 호텔에서 열린 퍼시픽 센추리 인스티튜트(PCI) 30주년 시상식장에서였다.

이 자리에서는 역내 국가들 간의 가교역할을 한 공로로 한 학자와 단체가 수상했다. 개인 수상자 시그프리드 헤커 스탠포드대학 명예교수는 미국의 국립 핵문제 연구소인 로스 알라모스 내셔널 랩 소장을 10년 이상 지낸 저명한 핵물리학자. 그는 특히 북핵 전문가였다.


지난 2018년에는 1992년과 2017년 사이 북핵 역사에 관한 심층 보고서를 펴냈다. 이 자리에서 북핵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는 “알 수 없다”고 답했지만, 북핵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야 핵을 안고 가려는 북한의 계산과 고민을 알 수 있다. 이런 바탕에서만 비핵화 전망도 가능할 것이다.

헤커 교수는 북한을 7번 방문했다. 북핵 시설을 둘러보도록 초청된 몇 안 되는 외부 인사. 미국의 핵 전문가에게 핵 시설을 개방했다는 것은 북한 정권이 그에게 갖는 신뢰를 가늠케 한다. 그가 핵 기술 분야뿐 아니라 북핵 문제의 정치적 해법에도 관여할 수 있는 전문가로 꼽히는 이유다.

그의 말대로 핵을 이용하면 지구상의 모든 불을 밝힐 수 있다. 하지만 핵은 지구상의 모든 불을 순식간에 꺼버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시간 시상식장 바깥세상의 최대 관심사였던 코로나바이러스의 위력에 댈 바가 아니다.

행사는 만찬 후 해커 박사와 또 다른 수상단체인 아시아재단 데이빗 아놀드 회장 등 전문가 패널로 이어졌다. 지혜와 인내, 이해 등의 다양한 요소기 대입돼야 비로소 접근 가능한 고차 방정식인 북핵 문제부터 아시아 역내 국가의 관심사가 짧은 시간이지만 거론됐다.

이 자리를 마련한 PCI는 태평양 시대를 연구하는 단체. LA 사업가 스펜서 김 회장을 중심으로 현 대통령 외교안보 특보인 문정인 교수, 미국인 전문가들이 공동 창립자에 이름이 올라있다. 지금은 캐서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대사가 이사장. 정책입안자, 학자 등 미국 유력인사들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PCI는 한국 이슈만 연구하는 기관이 아니지만, 북핵이 역내 최대 문제로 부상하면서 한반도가 주요 의제가 되고 있다. 특히 지금처럼 한미 관계가 어수선할 때 미국 측 전문가들이 모여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미국 조야에 미칠 영향 면에서 의미있는 일로 보인다.

미 서부지역에는 이런 성격의 단체가 PCI 외에는 없다. PCI는 특히 1993년부터는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와 함께 차세대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다인종 고교생을 지역별로 각각 8명씩 선발해 열흘간의 한국 방문이 포함된 다인종사회의 리더가 되는데 필요한 사항과 한국문화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정수기를 틀면 물이 쏟아지는 데도 플라스틱 병 물에다 화장지까지 사재기하는 이 이상한 때, 한인사회 한쪽에서 200명 가까운 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런 담론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커뮤니티의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어지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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