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출근길에 한국뉴스를 듣던 중 갑자기 가슴이 ‘따뜻’ 해졌다. 라디오 뉴스앵커가 대구의 어느 옷 수선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코로나19 폭격을 맞은 대구는 혹한의 도시이다. 모든 게 꽁꽁 얼어붙었다.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거리도 식당도 술집도 텅 비었다. 이 와중에 옷 수선 맡기러 나올 사람은 더 더욱 없을 것이었다.
“만나본 적도 없는 건물주가 전화를 해왔어요. 손님도 없는데 매일 (가게) 나와서 고생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는 겁니다. 이달 월세를 안 받을 테니 월세 걱정은 말라고 하더군요.”
어머니가 옷 수선가게를 오래 해왔다는 그 여성은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그 건물에서 장사하는 4개 점포 주인들 모두 같은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앵커는 건물주를 전화로 연결했다. 늙수그레한 남성이었다. 건물은 그의 노모 소유라고 했다. 그가 노모에게 요즘 상황을 설명하고 월세 안 받기를 제의했더니 “아, 그라믄 그리 해야지”하며 흔쾌히 승낙했다고 전했다. “장사하는 친구들 모두가 어렵습니다. 여럿이 일부러 찾아가서 밥도 먹고 격려도 하고 합니다. 같이 이겨내야지요.”
바이러스 공포에 대한민국이 아귀도로 떨어진 듯 혼란스럽다. 그악스럽게 마스크를 사들이고 생필품을 싹쓸이 하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며 우리 유전자에 깊이 박힌 생존본능의 소산일 것이다.
그런데 매번 위기상황 때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저마다 자기만 살겠다고 아귀다툼인 와중에 다른 편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평화롭고 따스한 모습들이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돕는 친절, 선행 혹은 사랑이다.
한국에서는 지금 상가 임대료나 원룸 월세를 깎아주거나 안 받는 건물주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조물주보다 무섭다는 건물주들이 고통분담에 나서며 세입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일이다.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왜 우리를 ‘따뜻’ 하게 할까.
캔디, 케익, 아이스크림 … 우리는 단것을 좋아한다. 초컬릿 한 조각 먹으면 입안에서 3초, 위에서 3분, 엉덩이에서 3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3초 달콤함의 유혹을 떨치지 못해 날씬해질 겨를이 없다는 푸념이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의지박약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수백만 년 진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맛을 좋아하게 된 것은 칼로리와 상관이 있다고 진화생물학자들은 말한다. 단맛 나는 것들에는 칼로리가 듬뿍 들어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인간 종은 알아낸 것이다. 먹을 것 귀하던 원시의 벌판에서 달달한 열매나 과일을 먹고 나면 오래도록 힘이 나니 단맛을 탐닉하도록 유전자에 정보가 각인이 되었을 것이다. 생존의 비결이다.
따뜻함은 안전의 느낌과 상관이 있어 보인다. 따뜻한 음식과 따뜻한 옷, 따뜻한 공간은 생존의 기본이다. 추운 밤 동굴 밖의 한기는 원시인들에게 위험 그 자체였을 것이다. 따뜻함은 안전, 그러니 좋은 느낌으로 각인되면서 다른 좋은 느낌들도 따뜻함으로 우리 몸은 받아들이는 것 같다. 친절/선행을 베풀거나 받거나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으로 짐작이 된다.
‘친절’의 효과는 오래 연구되어왔다. ‘친절 과학’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이다. 대구의 건물주가 월세를 안 받을 때 세입자들과 주고받는 것은 금전적 호의나 이득만이 아니다. 친절 혹은 선행을 베풀거나 받으면 뇌에서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옥시토신은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 분비되는 ‘사랑 호르몬’. 엄마와 아기 사이의 긴밀한 유대감과 신뢰감을 만들고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화학물질이다.
친절/선행을 하면 옥시토신이 나오면서 사랑으로 가슴이 따뜻해지고, 따뜻하니 혈관이 이완되면서 혈압이 낮아진다. 아울러 천연진통제, 엔돌핀이 생성돼 통증과 스트레스, 불안증, 우울증이 경감되고, 세로토닌이 분비돼 행복감이 고조되는 한편 상처가 빨리 아문다.
면역력 강화효과도 있다. 카네기 멜론 대학 연구진은 건강한 자원자 400명을 감기바이러스에 노출시키는 실험을 했다. 이어 연구 참여자들이 매일 따뜻하게 안아준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감기에 덜(32%) 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친절’의 중요한 특징은 전염성이다. 누군가 선행을 하면 이를 본 사람들도 따라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다. ‘친절 바이러스’ 이다. 이 모두는 뇌에서 시키는 일.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것이 결국은 다함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유원한 진화의 과정에서 터득했을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기세등등하게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 몹쓸 바이러스에 우리는 무엇으로 맞설 것인가. 위생수칙 잘 지키면서 우리 안에 내재된 바이러스를 활용하면 좋겠다. 면역력을 높여주고 불안과 불신을 몰아내주는 바이러스 바로 친절 바이러스이다. 서로를 따뜻하게 배려하고 돌보는 마음들이 위기를 넘어서게 할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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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