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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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분양

2020-03-02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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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의 추도식에 참석한 일이 있다. 돌아가신 분의 조카라는 아이가 생전의 삼촌을 추모하는 말을 하였는데 듣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열서넛 밖에 안 나 보이는 이 아이는 삼촌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여 주었는지를 꼬박꼬박 기억을 더듬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의 삼촌은 잊을 수 없는 사랑을 분양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지만 문제는 어떤 이름을 남기느냐 하는 것이다. 향기로운 이름을 남길 수도 있고 꺼림칙한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존경스런 이름을 남길 수도 있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나의 친구였던 K목사를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시골의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넓은 교회 마당에 언제나 수 십 개의 화분이 있었다. 친구나 방문객들에게 화분 하나씩을 나누어 주는 것이 그 분의 취미였다. 나는 그것은 화분의 분양이라기보다 사랑의 분양이라고 생각하였다. 값으로 치면 몇 푼 안되는 것이지만 그 분은 오랫동안 정성을 다 기울여 키운 자신의 작품을 아낌 없이 나누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교 다닐 때 2년 동안 L목사를 도운 일이 있다. 그 분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하꼬방(판대기로 지은 초란한 집)에서 평생을 살며 그들을 도우려고 식품과 약품을 구걸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시던 분이다. 내가 도운 일은 그 분의 하꼬방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만들어 빈민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L목사야 말로 가진 것은 없으나 사랑을 분양하고 있는 훌륭한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조용한 이해이며 신뢰하는 것이다. 용서해 줄 수 없는 상태라면 아직 사랑은 아니다. 사랑이란 최선을 다한 충성이다. 당신이 하는 일에 사랑이 들어있으면 당신은 의미있는 역사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당신이 거창한 사랑을 이룩했다고 자부해도 진정한 사랑의 행위가 아니었다면 그대는 또 한번 무의미를 반복한 것이다. 남이 표현해 오면 나도 표현하겠다는 사람은 사랑을 평생 해볼 수 없다. 사랑의 표현에는 기다림이 필요없다. 동양인의 전통적 덕목인 겸양지덕(謙讓之德)은 사랑의 표현에 있어서만은 금물이다.

미국인에게 배워야 할 두 마디가 있다. 그것은 I love you(사랑합니다)와 I am sorry(미안합니다)이다. 이 두 마디를 애용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 두 마디는 우리의 대인관계를 무척 이나 부드럽고 원활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교회 예배 시간에 부부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부부 사이의 간격이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어떤 내외는 바싹 앉았고, 어떤 부부는 멀리 떨어져 앉았다. 너무 붙어있는 것도 더워 보이지만 너무 떨어져 앉은 것도 보기 불편하다. 정다운 간격을 각자가 알 것이 아닌가?

사랑은 좀 더 직접적이요 불꽃 같이 강렬한 것이다. 그것은 결정작용(結晶作用)과도 같다. 분리되었던 물방울들이 영점 이하의 강추위를 만나면 오히려 얽혀 굳게 맺어진다. 어머니가 아기를 키우는 것을 보면 사랑이 잘 이해된다. 어머니가 보는 아기의 성장이란 곧 생명이요 기적이었던 것이다.

눈감고 사랑하고 듣지 말고 도와주고 말 없이 끌어 안으라. 사랑은 차별하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 받을만한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사랑은 교환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다. 요즘은 정직한 사람이 미련한 사람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정직하게 살아라. 아내에게 다 털어놓아라. 남편에게 비밀이 없게 하라. 정직의 폭이 사랑의 폭이다. 아들에게 다소 멋쩍어도 정직한 아버지가 되어라. 딸에게 좀 체통이 깎여도 정직한 어머니가 되어라. 일에 정직한 것이 근면, 권위에 정직한 것이 충성, 신에게 정직한 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정 중요한 것은 당신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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