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김영태 전 LA한인회장이 별세한 것을 시작으로 2월에 들어서만 윤석원 전 가주한미포럼 대표, 김봉구 미주방송인협회 명예회장 등 유명 인사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한인사회의 유력 인사와 인터뷰할 기회를 많이 가졌던 것은 행운이다.
작고한 분들 가운데 정원훈 전 행장(가주외환·한미·새한·아시아나은행), 찰스 김 전 하나금융 이사장, 박기서 그루엔 어소시에이츠 대표, 카니 강 전 LA타임스 기자, 조영근 전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 윤석원 전 가주한미포럼 대표, 김봉구 미주방송인협회 명예회장 등과 인터뷰를 통해 나눈 대화들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한인사회는 물론이고 미 주류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열심히 일한 분들이다. 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하나둘 타계하면서 느끼는 것은 인생무상이다. “좀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하셨으면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인이민사회가 연륜이 깊어가면서 이민 1세대 한 분 한 분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요즘은 사랑하는 모친이나 부친이 별세해도 주위에 잘 알리지 않고 가족끼리 조촐하게 장례를 치르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문제는 고인의 유물이나 생전 기록 등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집안의 가풍이나 문화가 기록을 통해 계승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손들이 선조들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본보가 지난 해 11월부터 ‘삶과 추억(Obituary)’ 지면을 신설해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슬픔의 순간을 넘어 고인을 추모하고 기억하며 생전의 삶의 모습과 스토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장을 마련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장례 일정을 알리는 짤막한 부고를 넘어 고인의 삶을 상세히 다루는 기사이다. 독자들이 가족이나 친지·지인의 상을 당했을 때, 또는 시기에 상관없이 이미 돌아가신 고인을 기억하기 위해, 생전 삶의 모습과 유훈 및 스토리 등을 쓰고, 또 가족이나 지인이 직접 작성한 고인을 향한 ‘조사’나 추모 글도 함께 게재하고 있다. LA타임스 등 미국 신문들의 오비추어리(Obituary)는 유가족이 고인의 생애를 소개하는 글을 유료로 신문에 의뢰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 해 12월31일 타계한 이석구 전 남가주 연세대학교 동문회장의 장녀 지선 씨는 “부친이 돌아가시고 경황이 없는 상황이라 처음에는 ‘삶과 추억’ 취재에 응하기가 망설여졌는데 마음을 바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지고 아버지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석구 전 연세대 동문회장이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 이승훈 씨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일반에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이석구 회장의 삶을 다룬 부고 기사가 게재되면서 장례식에는 700여명의 지인이 참석해 온화하고 반듯한 성품으로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한 그의 삶을 추모했다.
요즘은 장례식도 예전과는 다르게 침울한 분위기가 아니라 조객이 밝은 색깔의 복장으로 참석해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지난 해 12월에 열린 고 안주은 CPA의 장례식에서는 경건한 장례예배의식이 끝난 후 평소 고인이 좋아했던 마이웨이 등 팝송, 아들과 함께 불렀던 듀엣, 가족음악회 등을 연결한 30분 동영상을 틀어 참석자들이 즐거운 분위기속에서 눈물, 콧물,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장례식 분위기가 슬프지 않고 오히려 기쁘고 행복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죽음은 무조건 슬픈 것이고 비극적이라는 기존관념에서 벗어나 어차피 맞이하게 될 죽음을 행복하게 맞자는 획기적인 사고방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10년 남가주 한인사회에서 40년간 봉사하다 73세에 타계한 이계조 한미문화교육원장도 성숙해진 장례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이 원장은 그해 4월 4기폐암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투병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기 몇 주전, 살아가는 동안 사랑을 주고받았던 지인들을 초대해 풍성하게 대접하면서 함께 공유했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 감동과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원장은 “떠나고 난 후에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오기보다는 오히려 살아있을 때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에게 최고의 식사를 대접하며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고 밝혀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귀감을 보여주었다.
한인이민사회에서 유력 인사가 됐든 평범한 삶을 살았든 그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룩한 것이 바로 오늘의 미주한인사회이다. 그분들이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교훈을 얻고, 그분들의 유지를 받들어 생전에 미처 이루지 못했던 과업을 각자 맡은 자리에서 완수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후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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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특집기획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