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의 경제소사]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2020-02-27 (목) 권홍우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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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력확장 도구로 이용

1933년 2월27일 밤 9시14분 독일 베를린 국가의회 의사당에 불이 났다. 소방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바닥 면적만 6만1,155㎡인 의사당의 대부분이 불길에 휩싸였다.

범인은 곧 잡혔다. 경찰은 네덜란드 태생의 실직 벽돌공이자 공산당원인 마리뉘스 판데르 뤼버(당시 23세)를 현장에서 방화범으로 붙잡았다. 화재 발생 약 25분 후 현장에 도착한 아돌프 히틀러 총리의 분노는 신문·방송에 의해 그대로 옮겨졌다. 프러시아 내무장관 겸 경찰 책임자 헤르만 괴링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의사당은 독일이 자랑하는 건축물이었다. 독일 통일(1870년) 직후 제국의회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1894년 준공된 의사당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나라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돔형 지붕도 이 의사당의 유리 돔에 영향받은 것이다. 의사당 방화에 대한 독일인들의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불은 왜 났을까.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신병자인 뤼버의 단독 방화설에서 나치가 은밀하게 기획한 자작극이라는 해석까지 다양하다. 나치가 의심을 살 만한 대목은 차고 넘친다. 동시 발화점이 6~10곳이라는 경찰과 소방서의 조사결과가 묵살되고 선거운동에 바쁜 히틀러 일행이 화재 직후 현장에 나타난 것도 의심을 샀다.


원인은 불분명하지만 의사당 화재가 몰고 온 파장은 크고 깊었다. 누구보다 나치가 반사이익을 누렸다. 나치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라고 일기에 썼을 만큼 화재를 반겼다. 히틀러는 세력 확장의 도구로 화재 사건을 활용해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연립내각의 총리에 취임한 지 27일밖에 안된 히틀러가 목을 매던 사안은 총선.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졸라 의회를 해산한 히틀러는 3월 초에 잡힌 총선에 모든 것을 걸고 전국 순회 유세에 비행기까지 동원하며 총력을 쏟았다. 방화 사건 이후에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총선에서 나치는 44%의 지지를 얻었으나 과반도 못 되는 상황. 반대파 정당을 불법 탄압하고 우파 정당들을 협박한 히틀러는 의회를 통하지 않고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켰다. 독일은 이후 국가 파시즘과 2차 세계대전, 유대인 대학살의 길을 걸었다. 독일 제3제국의 전쟁범죄는 나치만의 책임일까. 히틀러가 노골적으로 폭주한 시발점인 의사당 방화를 둘러싼 나치의 선전·선동에 속았던 독일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다. 가짜뉴스에 휘둘리는 나라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악은 무사유에서 핀다.

<권홍우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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