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색 가방 하나가 오래 전부터 책상에 놓여 있다. 태평양 건너올 때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레 들고 온, 시아버지의 젊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가방이다. 원래는 튼튼한 통가죽이었지만, 올해로 70년이 넘다 보니 주인만큼이나 노쇠하여 만지면 바스러질 것만 같다. 오늘은, 건드리기도 겁이 날 만큼 오래된 가방의 아득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는 날이다.
세월의 소실점 가까이에서 나는 한 청년을 만났다. 알전구 하나뿐인 어둑한 방,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있는 문학청년이 보였다. 그는 우수와 고뇌에 찬 얼굴로 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 소설을 썼다.
한쪽 어깻죽지가 처진 그의 등이 이따금씩 흔들렸다. 세상 모든 고민을 끌어안은 듯한 젊은이의 그림자가 방바닥에 눌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재떨이 가득한 담배꽁초와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구겨진 원고지를 보면 마치 기성작가의 방 같았다.
한 여자를 사랑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가.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는지 방안이 담배연기로 매캐했다. 삶의 소용돌이도 결별의 아픔도 모르던 젊은이가 쓰고 싶은 사랑 이야기란 어떤 내용이었을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은근한 여자의 사랑에 마음 졸이는 남자 이야기가 절정을 이루는 평범한 소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가올 운명을 미리 알 수는 없었겠지만, 풍파와 고뇌를 겪은 중년이 지나고서 글 쓸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지금보다는 좀 더 깊은 맛이 나는 소설이 됐을 것이다. 단지 쓰고 싶다는 갈망만으로, 숱한 담배꽁초가 쌓일 때쯤 단편소설 분량의 원고가 겨우 완성됐다. 그는 해냈다는 벅찬 희열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여자에게 달려가서 보여주고 싶었으나 그럴 용기는 없었다.
때가 되면 신춘문예에 응모할 생각으로 그는 원고를 책가방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가 사주신 가방이었다. 자신의 운명이 길모퉁이 저편에서 얼굴을 감추고 가방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청년은 상상도 못 했을 터였다. 가방이 운명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세월에 풍화되리라는 것을 어찌 짐작할 수 있었을까. 시대의 부름에 응해 입대했고, 군에 복무하면서 한국전쟁 중에 치른 크고 작은 전투에서 그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부상당해 전역하기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시간에, 그에게 문학은 사치였다.
결혼하여 사남매를 키우는 동안, 우여곡절 끝에 집안이 기우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텅 빈 호주머니를 파고들던 추위를 몸서리치며 견디던 시간이었다. 고단한 가장으로서의 삶에 일간신문 이외의 언어가 들어설 자리는 끝내 없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 같은 현실은, 신춘문예의 꿈이 어두운 가방 속에 잠들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게 했다. 가슴에 휑한 바람이 드나드는 초로에 이를 무렵, 새 식구를 들였다. 맏며느리였다.
며느리는 한 식구가 된 지 20여년 만에 오래 근무하던 교직을 접고 멀고 먼 나라로 이민 가더니 수필가가 되었다. 문학청년이던 그는 아흔에 접어들었고, 그의 삶도 흐릿하게나마 종착역이 보이는 듯했다. 멀리 사는 맏아들 부부가 찾아온 날, 반세기가 넘도록 열지 못한 가방을 그는 며느리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걸 줄 사람이 없구나. 한번 읽어 보렴, 에미는 글 쓰는 사람이니까.”
주는 손끝도 받는 손끝도 가볍게 떨렸다. 가방 속 소설의 여주인공은 이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뒤였다. 그날 며느리를 붙들고 그 동안 가슴에 품고 살던 짧지 않은 자신의 역사를 풀어놓는 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던가, 아마 그랬던 것 같다.
한 청년의 푸른 꿈이 들어있던 가방. 그것을 시아버지는 책가방이라 불렀다. 책가방, 요즘은 듣기도 어려운 그 단어가 정겨웠다. 나는 그 가방을 볼 때마다 호기심이 일면서도 막연히 두려웠다.
어느 날 마음먹고 조심스레 여는데 삭은 끈 하나가 툭, 끊어졌다. 불길한 생각에 손길이 멈췄고 더는 건드리지 못했다. 그 튼튼한 소가죽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지. 가방 앞을 지날 때면 마음이 붙잡히곤 했으나 결국 시아버지의 소설을 읽지 못한 채, 나는 문학청년이던 그를 영영 잃고 말았다.
돌아가시고 나서, 너무 늦게야 열어 본 가방에서 두고두고 쏟아져 나오던 시아버지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읽던 기억. 드나드는 승객도 없는 간이역을 거쳐 폐역이 되어버린 곳에 앉아, 운행을 멈춘 지 오래된 낡은 기차를 바라보는 심정이라고 할까. 지금도 가방을 보면 쓸쓸하다. 자상한 품성의 시아버지와 좀 더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아쉬워서. 문학청년으로서의 그를 진작 만났더라면 싶어서. 그리고, 이승에서 그분을 스쳐 간 지난한 세월이 덧없고 덧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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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