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선 ‘인도스먼트’

2020-02-19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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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 꼽히는 뉴욕타임스가 지난 1월말 민주당 대선후보로 매서추세츠 연방 상원의원인 엘리자베스 워런과 미네소타 연방 상원의원 에이미 클로버샤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가 2명의 손을 동시에 들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론 추이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결정이지만 아무튼 이 신문은 독자적인 선택을 하고 이를 공표했다.

‘인도스먼트’(endorsement)라 불리는 지지결정을 내리기 전 15명으로 구성된 뉴욕타임스 논설위원실은 민주당 후보 9명과 개별적인 심층 인터뷰를 가졌다. 그리고는 철저한 사전조사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치열한 토론을 벌인 끝에 두 명의 여성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인도스먼트 과정이 독자들과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미국 신문들이 대통령 선거에서 특정후보에 대해 공식적으로 지지 입장을 밝히는 것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력 신문의 이런 지지선언은 당연히 표심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선거철이 되면 어느 신문이 누구를 인도스먼트 하는가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


미국 신문들의 이런 전통은 건국 초기에 생겨났다. 그러나 초기 신문들은 대부분 특정정파를 일방적으로 옹호했을 뿐 아니라 정치인이 신문사를 소유하고 자신의 홍보수단을 활용하는 사례도 흔했다. 지지후보 선언의 배경에는 이런 일그러진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워싱턴 대통령이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알렉산더 해밀턴과 부통령을 지낸 애런 버가 1804년 벌인 권총 결투로 해밀턴이 사망한 비극도 이런 일그러진 역사가 씨앗이 됐다. 이 두 사람은 신문사 소유주로 정적을 음해하는 데 신문을 동원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서 비롯된 감정싸움이 결국 권총 결투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미국 신문의 사유화와 당파성은 역설적으로 객관적인 저널리즘이 태동하는 토양이 된다.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사실’과 ‘견해’를 분리해 지면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논설을 통해서는 신문사의 견해를 표명하고, 대신 일반 지면에는 정파적 입장에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사실보도를 하자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지금까지도 비교적 잘 유지되어오고 있다. 사실과 견해의 분리 원칙은 민주당 후보 인도스먼트를 하면서 뉴욕타임스 논설위원실이 “우리는 편집국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밝힌 데서도 확인된다. 바꿔 말하면 편집국도 논설위원실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논설위원실이 특정후보 지지를 선언했다고 해서 편집국 보도가 이 후보에 편파적이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관행이 된 미국 언론들의 인도스먼트를 한국 언론들에게도 허용하자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하지만 선관위는 선거법 유권해석을 통해 ‘불가’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언론이 지지후보를 밝히면 선거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는 공정한척하면서 실제로는 특정후보를 교묘하게 밀어주는 이중적인 보도태도가 노골화되고 있다.

사실 선관위의 유권해석 이전에, 인도스먼트 허용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여겨지는 진짜 이유는 대다수 한국 언론들이 사주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인도스먼트 결정 과정에서 사주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힘든데다, 일단 지지후보를 결정한 후에도 중립적으로 사실보도를 할 수 있을 만큼 편집국의 독립성이 보장돼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미국언론들이 누리는 수준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인도스먼트를 허용한다면 많은 언론들이 스스로 언론이기를 포기하며 특정후보 당선시키기에 올인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선거판을 뒤덮게 될 게 뻔하다.

역시 관건은 언론이 독자들로부터 얻는 신뢰의 문제로 귀결된다. 독자들이 객관적이면서 공정한 사실보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정치적 지지선언은 자격과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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