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홀한 그리스 문명…신들이 노닐던 땅 시칠리아

2020-02-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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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그리젠토와 시라쿠사

황홀한 그리스 문명…신들이 노닐던 땅 시칠리아

시칠리아 아그리젠토의 콘코르디아 신전. 그리스 신전 중에서 가장 온전하게 보전된 신전이다. 유네스코 로고의 모델이 된 신전이기도 하다.

황홀한 그리스 문명…신들이 노닐던 땅 시칠리아

산 레오네의 터키 계단.


황홀한 그리스 문명…신들이 노닐던 땅 시칠리아

콘코르디아 신전과 청동 조형물.


황홀한 그리스 문명…신들이 노닐던 땅 시칠리아

시라쿠사 대성당.



빛이 다르다. 견과류 같은 고소함이 그 빛에서 번지는 듯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 정가운데에 자리한 섬이다. 지중해의 볕과 바다, 기암의 산자락이 어우러진 풍경이 가슴을 벅차게 한다. 그 땅에 깃든 신화의 유적들은 또 어떠한가. 아르키메데스의 전설이 녹아 있는 시라쿠사(Siracusa), 그리스 신들이 한데 모인 아그리젠토(Agrigento) 신전의 계곡 등. 굴러다니는 돌덩이 하나 하나가 유적이고 신화의 부스러기들이다.‘대부’‘시네마 천국’‘일 포스티노’‘그랑블루’ 등의 영화가 시칠리아를 무대로 한다. 차창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풍요로운 시칠리아의 스토리들을 떠올려본다. 신화와 영화, 소설로 남겨진 시칠리아의 이야기들이 왜 그토록 세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줄을.


문명이 태동하면서부터 수천 년의 시간, 페니키안부터 그리스 사라센 로마 노르만 등 수많은 세계인들이 몰려든 것도 지중해의 아름다움이 응축된 시칠리아의 매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매력이 더 커지는 섬이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장화 끝에 걸린 그냥 섬 하나가 아니었다.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시칠리아가 없었다면 이탈리아는 영혼에 아무런 잔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모든 핵심이 있다’고 적었다. 그가 옳다.

■신전들이 줄지어 늘어선 아그리젠토

시칠리아에 문명의 빛이 내린 건 그리스인이 이 땅에 찾아왔을 때부터다. 기원전 700년경 그리스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시칠리아로 건너와 섬의 해안 대부분을 차지하며 제각각 도시국가를 발전시켰고, 섬을 제2의 그리스로 만들었다.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서로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천재성의 경쟁으로 건축과 예술 문화에 경이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섬의 남부에 있는 아그리젠토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학적 유적지다. 기원전 5세기 인구 20만명이 머물던 지중해의 거대 도시였다. 옛 이름은 아크라가스(Akragas). 그리스 시인 핀다르는 이 도시를 ‘인간이 거주하는 곳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며 ‘시민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잔치를 벌였다’고 기록했다.

도시의 바다를 내려다 보는 언덕엔 그리스 신전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이름하여 ‘신전의 계곡’이다. 동쪽 끄트머리의 헤라 신전을 필두로 콘코르디아 신전, 헤라클레스 신전, 제우스 신전들이 이어져 있다.


헤라 신전에서 걸음을 시작했다. 신전의 붉은 기둥이 시선을 붙잡는다. 2,500년 이상을 버텨 낸 그 힘찬 기둥엔 그 시간만큼 맞이했던 일출의 붉음이 배어 있다. 헤라 신전에서 콘코르디아 신전까지 아치형 구멍들이 나 있는 성벽이 이어진다. 비잔틴시대의 무덤들이다.

콘코르디아 신전은 거대한 모든 기둥이 아직도 서 있는, 현존하는 그리스 신전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건축물로 꼽힌다. 현재 유네스코 로고의 모델이 이 신전이다. 콘코르디아 신전이 잘 보전될 수 있었던 건 6세기경 교회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당시 주요 구조물이 보강돼 다른 신전들이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 잘 버텨 낼 수 있었다. 또 이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땅 아래에 부드러운 진흙층이 있어 지진의 충격을 완화해 줬다고도 한다. 이러한 지층의 비밀을 당시 건축가들도 알았을까. 고고학자들은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신전은 멀리서 보면 더 아름답다. 가이드는 “거대한 건물 그 자체엔 이데올로기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시민들에게 위대함을 각인시키기 위해 세운 것이기에 멀리서 올려다 보면 더 웅장해 보이도록 건설됐다는 것. 기둥의 하단을 상단보다 더 두껍게 한 것도, 각 코너의 기둥을 안쪽으로 살짝 기울어지게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콘코르디아 신전 아래엔 8개의 기둥만 남아 서있는 헤라클레스 신전이 있고, 길 건너에 제우스 신전이 있다. 제우스 신전은 건설 당시 카르타고의 침공이 없었다면 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으로 완성됐을 건물이다. 미완성의 신전은 지진에 의해 무너져 온전히 서 있는 기둥도 없다. 이 신전의 잔해 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인간의 모양을 한 8m 길이의 석물이다. 신전의 지붕을 짊어지는 기둥의 역할을 했던 구조물이다.

신전이 내려다보는 바다도 황홀하다. 아그리젠토와 가까운 해안은 산 레오네. 이곳엔 터키 계단(Scala del Turchi)이란 절경이 있다. 거대한 순백의 해안 절벽이다. 아랍과 터키의 해적들이 이곳 해변에 출몰해 그 계단 모양의 절벽을 타고 올라와 불려진 이름이다. 지중해의 찬란한 빛을 받아 푸름과 하양이 절정의 조화를 이룬다.

■아르키메데스의 시라쿠사

시라쿠사의 500년 역사는 다른 도시국가들과 달랐다. 전성기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도시였다. 시칠리아는 ‘마그나 그라에키아’ 즉 ‘대(大) 그리스’로 불렸는데 그 중심은 항상 시라쿠사였다. 때론 시라쿠사의 역사가 시칠리아 역사로 착각되기도 한다.

도시는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와의 히메나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번영의 가도를 달렸다. 오르티지아 섬에서부터 시작된 도시는 내륙의 언덕 위로 확장돼 아크라디아, 티케, 네아폴리스, 에피폴라이 등 4개의 자치구가 더해지며 막강한 다섯 도시 연맹을 이룩했다.

한때 이곳은 그리스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정받았다. 질투를 느낀 아테네가 쳐들어왔을 정도였다고. 도시 곳곳에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섰고 세상의 현자들이 몰려들었다. 플라톤도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포에니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211년 시라쿠사는 독립을 잃고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맞서 1년여를 버티다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로마군이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공격을 퍼부을 때 시라쿠사를 방어한 건 천재 아르키메데스였다. 로마인은 한 사람의 두뇌가 4개 군단과 맞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사정거리를 마음대로 조절하며 이동도 자유로운 투석기 때문에 골치를 앓아야 했다. 바다쪽 성벽에서는 기괴한 기계가 뻗어 나와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로마의 공격용 사다리를 쳐 바다로 내던졌다. 신무기의 공세를 피해 성벽에 올라탔어도 오목거울에 반사된 햇빛 공격에 눈이 부셔 바다로 곤두박질쳐야 했다.

도시엔 ‘테아트로 그레코’라는 거대한 야외극장이 남아있다. 무대에서 객석의 맨 끝까지 거리가 150m에 달하는 매우 큰 규모다. 이날 찾은 야외극장의 객석엔 나무합판이 덮여 있었고 무대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2,500년이 넘은 극장 무대에서 지금도 실제 공연이 펼쳐지는 것.

야외극장 인근엔 예전의 채석장인 라토미아 델 파라디소(Latomia del Parsdiso)가 있다. 바위를 캐간 그 자리는 지금 비옥한 정원으로 채워졌다. 라토미아 서쪽에 S자형태의 동굴이 있는데 이는 ‘디오니시우스의 귀’라고 불린다. 의심이 많은 군주인 디오니시우스가 자신의 정치범들이 무슨 말을 하나 알고 싶어 가두었다는 것. 동굴의 윗부분에 귀를 대고 있으면 안에서 하는 속삭임까지 다 들린다고 한다.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지오가 동굴의 기묘한 울림을 듣고는 상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양 전해 내려온다.

인근에 제우스를 위한 거대한 제단이 있다. 히에론 왕이 세운 제단으로 매년 축제일엔 엄청난 양의 제물이 바쳐졌다. 한 번에 450마리의 황소가 바쳐진 제단이다. 피가 흥건하고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축제일엔 도시 전체가 흥청거렸다.

로마식 원형극장도 제단과 멀지 않다. 그리스 극장이 반원형이라면 로마 극장은 원형이다. 그리스인들은 죽음의 연기나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 만족했지만 로마인들은 실제의 죽음과 피를 요구했다. 검투 같은 화려한 볼거리가 펼쳐진 공간이다.

오르티지아 섬은 로마 이후의 중세가 녹아 있는 공간이다. 섬의 중심에 대성당이 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나 신전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이후 교회로 사용되다 1693년 대지진 때 피해를 입자 바로크양식으로 화려하게 다시 태어난 건물이다. 당시 신전의 기둥들이 일부 재활용됐다. 기원전 1세기 키케로가 보고 남긴 기록에 따르면 신전의 지붕엔 금으로 된 아테나 동상이 서 있어 뱃사람들이 이정표로 삼았다고. 지금은 같은 자리에 마리아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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