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남자배우가 선배인 하정우에게 사전 약속 없이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다. 전화를 건 배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으니 “걷고 있는 중”이란 응답이 돌아왔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대답이었다. 하정우는 끊임없이 걷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에 보통 3만 걸음을 걷는다니 그의 걷기사랑은 거의 신앙수준에 가까워 보인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강남에서 김포공항까지 8시간을 걸어서 간 적이 있을 정도다.
수년 전 우연히 도전한 국토대장정을 통해 걷기의 매력에 빠진 후 걷기는 그의 일상이 됐다. 자신의 체험을 아예 책으로 펴내기도 했으며 책이 인기를 끌면서 한국사회 걷기 열풍에 일조를 하기도 했다.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라는 게 하정우의 지론이다.
하정우의 예찬이 아니더라도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신체건강 뿐 아니라 인지능력 강화에도 걷기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꾸준히 걸으면 뇌의 해마와 전두엽의 기능이 활성화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선진국에서는 걷기를 치매예방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처럼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과연 얼마나 어떻게 걷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생각들이 제각각이다. 우선 하정우가 걷는다는 하루 3만보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보통사람들이 많이 세우는 하루 목표는 1만 걸음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실천이 쉽지 않다. 미국인들의 하루 평균 걸음 횟수는 4,000~5,000보이다. 이를 두 배로 늘린다는 건 상당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없이는 달성하기 힘들다.
하지만 너무 이런 수치에 압도당할 필요는 없다는 게 하버드 의대 아이민 리 교수의 조언이다. 리 교수에 따르면 ‘하루 1만 걸음’이라는 수치는 지난 1960년대 일본회사가 시판한 ‘만보계’의 마케팅 결과로 우리 뇌리에 강하게 새겨진 것일 뿐 과학적 근거가 있는 수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현재보다 하루 2,000걸음 정도만 더 걸어도 충분한 건강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리 교수는 자신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를 이번 달 미 의학저널에 발표했다. 연구 대상은 66세에서 78세 사이의 여성 1만7,000명이었다. 할머니들 가운데 하루 7,700걸음 이상 걷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가장 낮았으며 하루 4,400걸음 정도 걷는 할머니들의 사망률 또한 2,000걸음 걷는 할머니들보다 낮았다.
재미있는 것은 7,500걸음 이상을 넘어가면 효과의 증가폭이 점차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무조건 많이 걷는다고 해서 건강효과가 비례해서 커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치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와 비슷하다. 돈이 많아질수록 어느 소득수준까지는 행복도 비례해 커지지만 일정 수입을 넘어서면 돈은 더 이상 행복의 요소가 되지 않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특정 수치에 대한 강박에 빠지곤 한다. 이른바 ‘목표 강박’ 혹은 ‘목표 중독‘이다. 신년부터 꾸준히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운동과 관련한 수치를 즉시 업데이트해주는 웨어러블 기기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운동중독 전문가들은 “걸음 수와 소비한 열량을 측정한다고 해서 실제로 체중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며 자칫 웨어러블 기기 때문에 ‘수치 강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오히려 웨어러블 기기가 건강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목표에 너무 압도돼 일일이 숫자를 헤아리며 걸을 필요는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몸이 보내는 신호와 직관에 의지해 걸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한 가지, 그냥 터벅터벅 발을 옮길 게 아니라 힘차게 걸음을 떼는 게 중요하다. 되도록 속도를 높이고, 의식적으로 보폭도 평소보다 4인치 정도 더 멀리 내디뎌보라. 그래야 몸과 마음의 활력이 솟아나고, 운동으로서의 걷기가 완성된다.
새해부터는 많이 걷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면 오는 25일 한국일보 주최로 열리는 거북이 마라톤 참가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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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