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항 대합실에서

2020-01-18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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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그리던 친구 부부를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 평일인데도 공항은 붐빈다. 떠나고 돌아오는 곳, 누군가를 맞이하고 보내는 곳. 공항대합실은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아픔이, 떠남의 설렘과 귀향의 안도가 교차하는 곳이다.

내가 떠나는 것도 아닌데 항공 노선의 목적지 이름만 봐도 심장이 뛴다. 전광판에 있는 지명을 보며 예전에 여행했던 곳을 마음으로 거닐거나,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있는 영상을 떠올리다 보면 뜻밖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이런저런 일로 여행하기 어려워 공항에 나온 지도 오래 됐는데, 고국의 친구가 우리 집에 오겠다고 연락을 했다. 토론토 공항대합실은 그들 부부와 30년 만에 만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설레고 기다려지면서도 오랜 세월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뛰어넘을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에 시선이 묶인 채 그녀와 나누던 아주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다가도, 탑승을 마치고 출발하는 비행기를 보면 엉뚱한 생각의 지도가 펼쳐진다. 어디로 가는 비행기일까. 그곳이 내가 가본 곳이든 미지의 세상이든 상상을 이어가다 보면 기다리는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상상 속의 나는 젊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내 옆 좌석에 누가 앉을까. 기대는 마냥 부풀고, 현실과는 달리 모든 게 내가 쓴 각본대로 펼쳐진다. 좌석에 앉자 옆 사람이 말을 건넨다. 삶의 철학이 나와 비슷하여 내가 원하는 주제의 대화를 내가 바라는 깊이로 이끌어갈 줄 안다. 관심과 공감으로 나의 반응을 수용할 줄도 안다.

지성과 이성을 내려놓고 감성과 감정만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능동적인 고독을 체험하는 사치를 누려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 나의 열망에 공감하는 사람과의 장거리 비행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된 것이다.

오랜 비행 끝에 착륙을 안내하는 방송이 들릴 때쯤이면, 나는 탑승 내내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며 비행을 마치게 될 것이다. 이국땅을 밟는 순간, 그때부터 나라는 존재는 예전의 내가 아니리라. 새로운 생의 문이 열리리라.’

상상에서 깨어나 보니 친구 부부를 싣고 오는 비행기는 여전히 도착 예정이다. 마음은 그들을 이미 만났건만 전광판은 예정 시각만 깜빡이고 있다. 내가 공항에 처음 와 본 게 언제였을까. 결혼하기 전까지는 공항에 꼭 한번 배웅 간 기억이 전부였다. 지금의 초등학교, 그러니까 그때의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이었으니 1960년대 초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일년인가 이년 예정으로 미국연수를 떠나셨다. 그때만 해도 미국연수가 흔치 않아서 그 일은 온 집안의 경사였다. 엄마가 만들어 준 새 원피스를 입고 한껏 치장한 꼬마 숙녀가 흑백사진 속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빠를 다시 만나려면 몇 밤을 자야 하는지. 꼬마는 아마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그때 배웠으리라.

그 꼬마가 20 몇년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수업에 지장이 없게 하려고 방학 때를 택했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이 휴강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한 결정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로서는 최선이라 여겼다. 막상 결혼식 과정에 관한 기억은 흐릿한 걸 보면 그날 사건이 충격이긴 했나 보다. 신랑신부 퇴장에 이어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돌아서는데, 실제상황이라며 공습경보를 발령했다는 속보가 전해졌다.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중공군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것으로 밝혀지며 결국 20분 만에 해제되었다. 그날의 20분은 20년만큼이나 길었다. 혼비백산한 하객 중에는 봉고차를 대절하여 참석한 중학생 제자들도 있었다. 나는 신부가 아닌 선생으로, 아이들을 어찌해야 할지 그게 더 걱정이었다. 김포공항과 신혼여행. 내 생애 첫 비행은 그렇게 가슴 떨리는 공포 끝에 시작됐다.

20년 후 인천공항 비행기는 우리 가족의 삶을 캐나다로 옮겨 놓았다. 공항을 드나든 이래 가장 여러 번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던 시간이었다. 고국에서 보낸 40여 년,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인연 맺은 모든 사람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비행기가 어쩌면 나를 타국에서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결혼식장에서 막연히 느끼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닮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시댁이라는 세상에 들어갈 때 미더운 남편 손을 잡았듯이, 이민이라는 낯선 세상에는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할 터였다. 가족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달래던 시간이 공항대합실에 긴 여운으로 남았으리라.

상념을 떨치고 바라본 전광판에 친구 부부를 태우고 온 비행기가 착륙했다는 글자가 반짝인다. 고국에서 그들과 나누던 추억이 살아나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색다른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곳, 잊지 못할 만남과 헤어짐으로 기억될 공항대합실에 그들이 활짝 웃으며 들어서고 있다.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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