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빈 곳간의 인심

2019-12-0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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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가장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은 제2차 대전이 끝난 직후였다. 미국의 경쟁자였던 유럽과 일본은 전쟁의 참화로 잿더미로 변했고 소련은 공산주의 정책으로 세계 시장에서 떨어져 나갔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도 그 뒤를 이었고 인도와 자원부국 남미 역시 경제를 국가 통제 하에 두고 자유시장의 성장을 방해함으로써 제 무덤을 팠다.

오직 미국만이 훨훨 날았다. 당시 미국 GDP가 전 세계 GDP의 절반을 차지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호시절은 6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70년대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미국경제를 멍들게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사건은 유럽과 일본 경제의 부흥이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아낌없이 이들 각국의 재건을 지원했다. 그 결과 공산주의 팽창은 저지했지만 미국의 경쟁자가 생겨났다. 세계경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고 일반 노동자의 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세계화와 자동화가 가속화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됐다. 중국과 인도, 남미의 값싼 노동력이 시장에 진입하고 웬만한 일은 기계가 다 해주면서 전문기술과 지식이 요구되는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 일반 노동자가 설 땅은 좁아졌다.

그 결과 미국 일반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지난 40년 동안 거의 오르지 않았다. 퓨 연구소에 따르면 1979년 미국인들의 평균 주당 소득은 232달러였다. 이것이 지금은 879달러로 늘어났다. 그러나 인플레를 감안할 경우 당시 232달러의 구매력은 현재 840 달러와 맞먹는다.

지금 미국경제는 10년에 걸친 장기호황이 계속되고 있고 실업률도 20년 만에 최저다. 이 정도면 미국 전체가 흥청거리고 웃음이 가득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이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앞으로도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람이 다수다. 그도 그럴 것이 월급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집값, 교육비, 의료비는 3배 올랐다.

최근 나온 CNBC 보도는 이런 통계를 뒷받침해준다. 이에 따르면 하위 소득 44%의 중간 연봉은 1만 8,000달러에 불과하다. 또 갤럽에 따르면 미국 직장인 10명중 6명이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형편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인의 80%가 그 달 벌어 그 달 살고 있으며 절반이 비상금 400달러가 없다는 통계도 있다.

물론 일반인들의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회사가 주는 건강보험과 은퇴구좌 지원금, 정부의 저소득층 보조 프로그램 등이 이 통계에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평범한 사람들의 주 수입원인 임금이 수십년 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의 근본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미국은 지금 전례 없는 사회적 갈등으로 어지럽다. 그 근본원인은 대다수가 사는 게 고달프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들 때 사람들은 그걸 남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2016년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대통령이 된 것도 고단한 백인들에게 멕시칸과 중국을 제물로 던져줬기 때문이다.

미국인의 임금정체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고 보면 미국사회의 분열과 대립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진리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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