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활동이나 관심의 중심을 뜻하는 포커스(focus)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라틴어로 포커스는 난로/화덕. 난로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둘러앉은 데서 지금의 뜻이 파생되었다고 한다.
난로에서 퍼져 나오는 훈훈한 온기와 맛있는 음식냄새는 단란한 가정의 기본요소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불이 있다. 인류가 일궈낸 찬란한 문명은 불이 있어 가능했고, 공동체 생활의 기원은 아마도 훈훈하고 맛있는 냄새 가득한 원시시대 어느 동굴 안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인류역사는 불과 더불어 진화했다. 거대한 야수들 득실거리는 대자연에서 호모족은 미미한 존재였다. 그런 인간이 힘을 갖고 동물세계와 분리해 문명세계로 진입한 것은 불을 손에 넣은 덕분이었다. 불이 있어 추위와 맹수로부터 보호받고, 조리를 통한 양질의 영양섭취로 뇌가 커졌으며, 흙을 구워 토기를 만들고 청동과 철을 녹여 무기와 도구를 만들면서 문명은 전진했다.
불을 다스림으로써 자연을 정복한 것이 인류문명인데,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가 되었나 보다. 한계를 모르는 인간의 정복욕에 자연이 분노한 걸까. 불의 역공이 가공할 수준이다. 인간이 이뤄놓은 것들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
캘리포니아가 또 다시 불타고 있다. 산불시즌 10월이 되면서 주 전역에서 20여개 산불이 일어나 수 주째 불타고, 수십만 명이 대피해 홈리스 생활을 하고 있다. 남가주에서는 특히 게티 센터와 레이건 대통령기념 도서관이 인근 산불들로 위협을 받으면서 전국민을 긴장시켰다.
산불의 기세는 21세기 들어 눈에 띄게 강해졌다. 가주 사상 최악의 산불 20개 중 10개가 지난 4년 동안 발생했고, 5대 최악의 산불은 지난 2년 동안 발생했다. 2017년 10월 북가주 소노마 카운티의 터브스 산불, 그해 12월 벤추라와 말리부, 벨에어 일대를 휩쓴 토마스, 크릭, 스커볼 등 남가주 연쇄산불 그리고 지난해 11월의 울지 산불과 캠프 산불이 대표적이다.
근년 산불의 특징은 날로 파괴력이 커진다는 것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반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난 28일부터 불타고 있는 게티 센터 인근에서는 2년 전에도 불이 났고, 지난 23일 발화한 소노마 카운티의 킨케이드 산불 역시 2년 전의 터브스 산불 지역으로부터 멀지 않다.
파괴력으로 보면 2018년 캠프 산불이 기록적이다. 2017년까지만 해도 터브스 산불이 가주사상 최악이었다. 22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5,640여채의 건물을 파괴했다. 하지만 ‘최악’은 불과 1년 후 경신되었다.
2018년 11월 8일 같은 날 남가주(울지 산불)와 북가주(캠프 산불)에서 불이 났다. 벤추라 카운티에서 말리부에 이르기까지 10만 에이커를 태운 울지 산불은 남가주 사상 최악, 북가주 캠프 산불은 가주사상 최악을 기록했다. 캠프 산불 피해는 85명의 생명과 1만8,800여 건물. 산중의 조용한 도시, 파라다이스는 완전 폐허가 되었다.
며칠 전 PBS가 다큐멘터리 ‘파라다이스의 산불(Fire in Paradise)’을 방영했다. 수마일 밖 인적 없는 산속에서 일어난 불이 어떻게 순식간에 한 도시를 집어삼켰는지를 분석했다. 낡은 송전선에서 타닥타닥 불꽃이 튀며 발화한 것이 아침 6시30분경. 연기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먼 곳이었는데, 강풍이 문제였다. 1분에 풋볼구장 80개를 지날 정도로 빠르게 이동한 불은 2시간 후 파라다이스에 도착하더니 4시간 만에 도시전체를 끝장냈다.
파라다이스는 산속 도시인만큼 구역별 산불대피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밀려드는 불길 앞에서 시스템 가동은 불가했다. 속수무책이었다.
불에 관한 신화나 전설은 많은 문화권에서 전해진다. 불이 인류에게 갖는 의미가 지대하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아득한 고대나라 수명국에서 수인씨(燧人氏)라는 신적존재가 인간에게 불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서양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그 주인공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들을 위해 천상의 불을 훔친다. 이에 격노한 제우스가 인간세계에 내려 보낸 선물이 최초의 여자, 판도라였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가 그를 아내로 삼는 데 그 집에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인간을 아끼는 마음에 질병, 재난, 원한, 복수 등 인간에게 나쁜 것들을 모두 담아둔 상자였다. 호기심 많은 판도라가 상자를 열면서 온갖 재앙이 인간 세상에 퍼져나갔다는 이야기이다. 재난은 불 혹은 문명의 대가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기후변화로 고온 건조한 날들은 계속 늘고 있다. 산불위험은 그만큼 높아진다. 소방차와 헬기, 소방관들로 대처하기에 산불은 이제 너무 빠르고, 너무 거대하다. 산불 피해를 당하지 않는 길은 이제 하나뿐이다. 자연의 영역으로 그만 들어가는 것이다. 자연의 경계를 파고드는 개발을 멈추는 것이다. 개발에 개발을 거듭해온 우리의 삶의 방식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
모든 게 빠져나간 판도라의 상자에 하나 남은게 있다. 희망이다. 어떤 재난도 우리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이번 산불의 이재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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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