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78 )제40대 Ronald Reagan 대통령⑩

2019-10-28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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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Iran 은 오랫동안 악연이 계속된 나라들이다. 한때 Iran 의 폭군 Shah 는 중동 에서 가장 미국과 깊은 친선관계를 유지해 왔었고 그시절에 Iran 은 미국에게 가장 믿을수 있는 석유공급 국가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Shah 가 Islam 교 국민혁명으로 퇴위된후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인들이 인질로 감금되는등 극도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 되었었다. 쏘련의 전투기가 KAL 여객기를 격추시켰던것과 비슷한 사건도 있었었다. Reagan 임기의 마지막해 이었던 1988 년 7 월 3일 Iran Air 655호가 Hormuz 해협의 이란 영공을 비행중에 미국 전함의 missile 에 피격되어 탑승자 290명이 전원 사망하였는데 그중 66명은 어린아이들이 었었다고 한다. 당시 Iran 과 Iraq 가 전쟁중으로 그 지역은 초긴장 상태에 있었었다. 그 지역에 미국측 함정 백여척이 있었다고 한다.

미국측 주장에 의하면 Iran 의 전투기로 생각되는 비행기가 공격을 할것처럼 하강하기 시작 하였었다고 한다. 군용무선으로 일곱번, 민간용 무선으로 세번 교신을 시도 하였으나 무반응이었던 까닭에 미국 전함은 missile 을 발사 했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UN 안전보장 위원회에 보고 되었으며 국제재판소에도 제소 되었었다. 미국 해군도 자체진상 조사에 나서서 미국측의 실수이었을 것임이 대강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Bush 부통령은 사고의 원인이 무었이든 간에 미국은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하였었다고 한다. 국제여론이 미국을 규탄 하였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1996년에야 피해보상으로 6,180 만불을 지불하면서 인명피해를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말만하고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었다.


젊었을 시절부터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었던 Reagan 은 대통령이된 이후에도 전세계 에서 공산세력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미군도 파병하고 소규모의 전쟁을 하는것도 주저하지 않았었으며 대쏘 외교에서도 도전적이었고 공산체제하의 소련의 낙후, 취약성 때문에 열전을 하지 않으면서도 쏘련과 공상권들을 패망하게 할수 있다고 생각 하였었 다고 한다. 1987년에는 Berlin 에 가서 “Gorbachev 서기장! 이 Berlin 장벽을 철거 하시요!” 라고 호통을 쳤으며 쏘련을 “Evil Empire” 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었다.

Reagan 은 쏘련군에 대항하여 싸워오고있던 Afghanistan 의 Mujahideen 게릴라에게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무기를 지원해 주어서 쏘련이 결국 손을 들고 철수 할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미국 CIA 의 Special Activities Division 을 보내서 게릴라들을 훈련 시키고 무기를 공급해 주었었는데 2001년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Afghanistan 의 Taliban 군과 전쟁을 시작한 후에는 그때 준 무기들이 거꾸로 미군에게 사용되었었다. 지금까지 계속되고있는 Afghanistan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전쟁이다.

Reagan 은 Carter 시대의 대쏘완화 정책을 탈피한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하면서도 쏘련 수뇌와 네번 이나 회담을 한후 1987년에는 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를 체결함으로써 일부의 핵무기 생산을 중단하기로 조약을 맺기도 하였었다.

임기 말엽쯤에 이르러서는 Gorbachev 와 상당히 대화하는 관계가 수립되어 서로 교환방문을 하기도 하였는데 쏘련에서 Reagan 의 인기가 높다는 농담도 나왔었다. Gorbachev 이전의 쏘련 당서기들의 부인들이 전형적인 쏘련 할머니들로써 비만하고 촌스러워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학교 교수이 었었다는 Raisa Gorbachev 는 아주 개방적이고 세련된 인품이어서 미국에서 인기가 대단 했었으며 한때에는 Gorbachev 가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면 당선될 것이라는 농담도 있었었다. 필자는 구소련의 폐막과 함께 서방에 개방되기 시작한 쏘련을 1991년에 관광 갔던적이 있었는데 막상 쏘련에서는 공산권의 “붕괘”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Gorbachev 를 쏘련사람들은 규탄하고 있어서 어리둥절 했었었다.

Reagan 은 2004 년에 93.5세로 사망하여 그때까지 세번째로 장수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었다. 그는 말년에 10여년동안 Alzheimer 를 앓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부인 Nancy Reagan 등 몇 사람만 알아볼 정도로 병세가 나빠져서 수년동안 일체의 외부 인사와 접촉을 하지 않았었다. 매일 대통령과 간단한 대화를 한다는 대통령 주치의 네사람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Reagan 이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Alzheimer 증세가 시작되었을것 이라는 풍문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Reagan 이 기자회견중 무엇을 잠깐 깜박해서 당황하는 순간을 경험하는것을 본적이 있는데 대통령 재임시 어느 도시를 방문 하던중 대동한 장관을 그곳의 시장으로 착각한 일도 있었다고 하며 백악관 출입기자 Leslie Stahl 은 Reagan 이 자기를 누구인지 잠간 몰라 보았던적이 있었다고 말했었다고 한다. 그가 언제부터 이 병을 앓기 시작하였었는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들이 있다.

Margaret Thatcher 영국수상이 방미 하였을때 Reagan 은 똑같은 내용의 말과 gesture 로 건배를 두번 반복 하였었다는 일화도 있다. 대통령 재임중 다소의 건망증이 시작된것 으로 짐작은 되지만 큰 문제가될 정도로 심각했던것은 아니었던것 같다.

Reagan 의 대통령 재임기간을 “Reagan 의 시대” 라고 하기도 하고 그의 지지자들은 “Reagan 의 혁명” 이라고 까지 과장해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최소한 그가 공화당을 활성화 시키고 근대적 보수주의가 미국의 정책에 많이 반영되도록 했던것은 분명하다. 그는 공화당원들이 적극적으로 투표하도록 만들었으며 보수적인 종교인들의 지지를 받아 내는데에도 성공하였었고 민주당원이면서도 민주당의 정책들에 실증이난 “Reagan Democrats” 라고 불리우던 새 지지자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었다. 그는 더욱 활발해진 공화당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었고 1988년 이후의 모든 공화당 대통령후보들이 그의 정책과 사상을 인용하였으며 공천과정과 대통령 선거운동때 그가 썼던 방법들을 재탕 하려고 하였었다. “Reagan 의 혁명에 입대한 쫄병”임을 자처한 2008년도 공화당 대통령후보 John McCain 은 “정부의 규모를 축소하고 역할도 줄여야 합니다. 정부는 해결사가 아니고 문제를 일으키는 당사자 입니다” 라는 Reagan 의 선거구호까지 인용 하였 었다고 한다. Reagan 이 은퇴하고난 25년후에도 공화당 모임의 연설들은 항상 “Reagan 예찬”으로 연설을 시작했었다고 한다.

Reagan 은 재임중에 국방비증액, 신무기개발, 군비강화등으로 쏘련이 승산없는 미국과의 군비경쟁으로 경제파탄을 감당하지 못하여 구쏘련체제가 더 빨리 붕괴되도록 하는 공로가 있었었다고 한다. 국내적으로는 그가 세금, 규제완화, 사회복지, 국방, 연방법원 등등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정책을 집행하였었다. 그의 재임중에 미국 경제가 활발해 졌었고 그의 퇴임후에도 그의 정책들의 여파로 좋은 경기가 계속 되었다고 그의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Reagan 의 비판자들은 그의 정책들이 “성공한것처럼” 보였었다 고도 말한다. “감세”를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감세 얼마후 증세를 함으로써 감세되었던 액수가 다시 올라 갔었으며 “세율”을 대폭 내림으로써 소수 부유층 들의 세금부담은 엄청나게 줄어 들었었지만 줄어든 세금을 차후에 중하층 사람들이 부담 하게 되어 “누구를 위한 감세이냐?” 라는 질문도 나왔었다. 재정적자의 대폭 증가로 국채가 늘어나서 현재의 부채를 후세들에게 떠다 맡기는 결과도 있었었다. “규제완화”는 대기업들에게 더 도움을 주는 수도 있었었고 Reagan 재임중에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더 강해졌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그의 임기중에 Medicaid, Food Stamp, Welfare, 불구자 지원금등이 감소되었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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