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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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보다 달콤한, 추억보다 먼 과거로 “나 돌아갈래”

2019-10-25 (금) 제천=글ㆍ사진 최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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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박자박 소읍탐방 - 제천 봉양읍

박하사탕보다 달콤한, 추억보다 먼 과거로 “나 돌아갈래”

단양의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은 자체로 훌륭한 전망대다. 남한강이 휘감아 돌아가는 가곡면 덕천리 마을에 가을빛이 곱다. 지난 4일 태풍‘미탁’의 영향으로 폭우가 내린 뒤라 푸르러야 할 강물이 흙빛으로 변해있다.

박하사탕보다 달콤한, 추억보다 먼 과거로 “나 돌아갈래”

영화‘박하사탕’ 촬영지. 터널을 빠져 나온 화물열차가 제천 방면으로 달리고 있다.


박하사탕보다 달콤한, 추억보다 먼 과거로 “나 돌아갈래”

배론성지는 잘 꾸민 정원 같다. 연못 주변 단풍나무에 울긋불긋 물이 들었다.


박하사탕보다 달콤한, 추억보다 먼 과거로 “나 돌아갈래”

둘레 8m가 넘는 느티나무 내부의 오백나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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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다 아름답기만 할까. 남루하고 초라해 들키고 싶지 않은 기억, 너무 쓰리고 아파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시절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 달콤하고 포근해진다. 시간의 마법이자 세월의 힘이다. 제천 봉양읍은 읍이라는 행정구역에 걸맞지 않게 중심지가 없다. 관광지도 산길 따라, 철길 따라 흩뿌려져 있다. 복고풍에 새로운 유행을 입히면‘레트로’가 되지만, 봉양의 관광지는 그 흐름과도 거리가 있다. 때로 아름답고 때로 눈물겨운 제천 봉양의 오래된 여행지를 찾아간다.

박하사탕처럼 달콤한 기억으로 “나 돌아갈래”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빠져나가면 바로 봉양읍이다. 수도권에서 거리상 가장 빠른 길은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IC에서 제천으로 가는 38번 국도다. 충주를 지나 다릿재터널을 빠져나오면 백운면이고, 박달재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봉양읍이다.

봉양읍으로 들어서기 전 백운면에 있는 영화 ‘박하사탕’ 촬영지를 찾아간다. 새 천년의 희망으로 들떠 있던 2000년에 개봉했으니 이미 추억의 영화다. 영화는 기찻길을 따라 더 먼 과거로 관객을 이끈다.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의 기억은 1994년 여름, 1987년 봄, 1984년 가을, 1980년 5월로 거슬러올라간다. 직업도 가족도 잃고 삶의 막장에 다다른 마흔 살 영호는 20년 전 야유회를 갔던 그 냇가 위 철로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며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다. 돌이켜보면 그가 돌아가고자 했던 시절 역시 녹록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고,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무참히 짓밟은 폭압의 시대였는데 말이다.

영화 촬영지는 38번 국도에서 원서천이라는 작은 하천과 나란한 시골길로 약 10km를 내려간다. 좁고 깊은 계곡을 따라 서서히 하강하던 길은 물굽이가 크게 휘어지는 곳에서 끝난다. 그 하천 위를 충북선(조치원~봉양) 선로가 가로지른다. 영호처럼 무모하게 선로로 뛰어들 수 없도록 주변은 철제 울타리로 단단히 막혀 있다. 교각 위 선로는 곧장 터널과 연결된다. 4칸짜리 무궁화호 열차와 수십 량을 연결한 화물열차가 수시로 들고난다. 박하사탕의 추억은 다리 위 선로와 그 아래 하천을 따라 무심하게 흐른다. 주변엔 영화 촬영지 팻말 외에 이렇다 할 편의시설이 없고 펜션과 귀촌 가구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제천 관광 일번지, 박달재의 전설

백운면과 봉양읍 사이 박달재는 제천 관광의 고전이다. 바로 아래 터널이 뚫린 뒤부터는 시간 많은 여행객만 일부러 찾는다. 제천의 상징적 공간인 만큼 소공원으로 꾸민 고갯마루에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 동상과 조각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먼저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노랫말 때문에 박달재 앞에는 천등산이 수식어처럼 붙는다. 하지만 실제 천등산은 충주 산척면과 제천 백운면 사이 다릿재터널 위다. 박달재는 북측 주론산(901m)과 남측 시랑산(691m) 사이 고갯길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는 작곡가 반야월(1917~2012)이 악극단 지방 순회 공연 중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길에 남녀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반야월은 일제강점기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를 다수 지었다. 이런 논란 때문에 노래비 옆에 반야월의 친일 행적을 상세하게 적은 안내문을 별도로 세워 놓았다.

박달재의 가장 큰 테마는 ‘박달과 금봉’이다. 한번쯤 들어봤을 전설에 살을 붙였다. 조선 중엽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선비 박달이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러 어떤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 집에는 금봉이라는 딸이 있었다. 둘은 첫눈에 반했고, 이튿날 떠나려던 박달은 며칠 더 묵는다. 박달은 금봉에게 과거에 급제한 후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한양으로 떠났지만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보기 좋게 낙방한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리에 가지 않았다. 그가 돌아올 날만 기다리며 고갯마루를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숨을 거둔다. 장례 후 돌아온 박달도 금봉의 환영에 이끌려 고갯마루에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박달이 죽은 고개, 박달재의 유래다. 박달재 공원에는 둘이 애틋하게 마주보고 있는 대형 동상을 비롯해 이야기의 주요 장면을 조각으로 세워 놓았다.


목굴암과 오백나한전은 박달재에서 꼭 들러야 할 곳으로 꼽힌다. 불당이지만 현대식 건물 안에 전시관 형태로 꾸며져 있다. 목굴암은 어성호(성각스님) 작가가 3년 2개월의 작업 끝에 둘레 8m의 느티나무 안에 새긴 아미타불이다. 나무 밑동 안으로 한 사람만 겨우 들어가 무릎 꿇을 공간이 있고, 고개를 들면 황금 불상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바로 옆의 오백나한전 역시 속이 보이는 느티나무 고목에 조각한 작품이다. 해학적인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 있어 불자가 아니어도 그 공력에 감탄하게 된다. 오백나한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정리하기 위해 모인 500명의 제자다.

박달재에는 이외에도 고려 말 이곳에서 거란족을 무찔렀다는 김취려(1172~1234) 장군 사당, 제천 출신 애국지사 이용태ㆍ용준 형제 흉상이 있다. 고갯마루까지는 백운면과 봉양읍 양쪽에서 도로가 나 있다. 가을빛을 더하는 구불구불 산길 드라이브도 운치있다.

순교인가 반역인가, ‘황사영 백서’ 쓴 배론성지

봉양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국도에서 왼편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면 천주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배론성지가 터를 잡고 있다. 언뜻 외래어처럼 들리지만, ‘배론’은 계곡 지형이 배의 밑바닥처럼 생겼다 해서 생긴 지명이다. 배론성지 뒷산은 ‘배 주(舟)’자에서 음을 딴 주론산이다. 지금은 성지까지 도로가 나 있지만 첩첩산중이라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기 좋고, 발각이 되더라도 산자락으로 흩어지기 용이한 지형이다.

배론성지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 한국 천주교에서 김대건 성인에 이어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 묘, 그리고 황사영 백서 토굴을 세 가지 보물로 친다.

토굴 안에는 무명천에 깨알같이 쓴 황사영 백서 사본이 전시돼 있다. 원본은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천주교에서 순교자로 추앙하는 황사영은 이 백서로 인해 신앙을 위해 나라를 배반한 반역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황사영은 1790년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정조가 그의 나이 20세가 되면 중용하겠다고 약속할 정도로 총명했다. 그러나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후 교리를 익히고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이 골짜기로 피신한 그는 토굴에서 조선의 천주교 탄압 상황을 적은 편지를 베이징에 머물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다. 밀서에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청나라 황제가 조선을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할 것을 제안하는가 하면, 서양 열강이 군대를 보내 조선에 무력을 행사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있었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는 반국가 종교로 규정돼 정부의 박해는 한층 심해졌다.

토굴 옆에는 이때 처형된 황사영의 동상과 ‘순교현장탑’이 세워져 있다. 동상은 일본에 거주하는 그의 후손들이 2005년 비용 절감을 위해 북한에 의뢰해 만들었다. 설명을 듣고 보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치켜든 모습이 다소 ‘북한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배론성지는 조각공원과 잔디밭, 산책로가 어우러져 잘 꾸민 정원처럼 아름답다. 연못 주변 단풍나무는 진작에 물이 올랐고, 10월 말이면 은행나무까지 노랗게 물들어 성지 전체가 화려하고 고운 가을 색을 입는다.

배론성지 초입의 ‘김종명 나뭇잎 예술 갤러리’에 잠시 들러도 좋다. 김종명씨는 자칭 국내 최초의 나뭇잎 예술가다. 2008년 농업기술센터를 퇴직한 후 제천문화회관에서 시작한 취미가 인생 2막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은 것이 그때 처음이었다니 손재주는 타고 난 셈이다. 나뭇잎 공예는 어릴 적 어머니가 창호지를 바를 때마다 나뭇잎과 꽃잎으로 수를 놓던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형태를 손상시키지 않고 나뭇잎 한 장을 정교하게 오려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주일, 이렇게 만든 작품이 지금까지 200여점이다. 느티나무처럼 작은 잎도 쓰지만, 양버즘나무와 후박나무 등 큰 잎을 주로 사용한다. 그의 작품은 영덕 해맞이공원에 상설 전시하고 있고, 봉화 백두대간수목원에도 선보일 예정이다. 다만 본인의 갤러리는 전원주택이라 전시공간으로는 협소하고 부적합해 보인다. 2,000~4,000원 하는 차 한 잔으로 입장료를 대신한다.

배론성지에서 원주 방면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하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탁사정(濯斯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초나라 굴원이 지은 어부사의 한 대목(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더러우면 발을 씻는다)에서 딴 이름이다. 제천시에서는 국도변에 한 폭의 그림처럼 자리 잡은 정자라 자랑하지만, 턱없이 과장된 표현이고 그저 한적하게 쉬어 가기 좋은 곳이다. 홍보 사진처럼 백사장과 솔숲이 어우러진 풍광을 보려면 사유지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 들어가야 해 이래저래 옛날 여행지가 되고 말았다.

다시 추억 속으로, 자야영당과 공전역

봉양읍 사무소에서 충북선 철길을 따라 남서 방향으로 내려가면 제천시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유적지 ‘자양영당(紫陽影堂)’이 있다. 이름이 사뭇 거창한데,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 성리학의 거두 송시열과 화서학파의 계보를 잇는 이항로ㆍ유중교ㆍ유인석 등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영당 앞에는 작은 서당이라 할 수 있는 자양서사 건물이 있다. 자양영당은 건물 자체보다 유인석(1842∼1915)이 강화도조약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킨 곳으로 유명하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의 실천적 발현이었다. ‘정학(주자학)을 지키고 사학(천주학)을 물리치자’는 위정척사론의 본거지와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천주교 배론성지가 이웃하고 있어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자양영당에서 강변 산책로를 따라가면 공전역이 나타난다. 강둑 주변 좁은 농지에 가을 정취가 가득하다. 2008년 문을 닫은 공전역은 현재 목공체험장 ‘우드트레인’ 간판을 달고 있다. 취미로 목공을 해온 김광기씨가 완행열차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폐역을 물색하다 2011년 찾은 곳이다. 역사로 들어서면 나무로 새긴 역대 대통령과 여러 인물 액자가 벽면을 가득 장식하고 있다. 판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정교하게 톱으로 잘라 만든 ‘우든 팝아트’ 작품이다. 우든 팝아트는 김씨가 최초로 개발한 기법으로 기념패를 만드는 데 주로 이용된다. 나뭇결과 색을 살린 장식용 도마도 인기다.

공전역 건너편 마을에는 기차역으로 번성을 누렸던 1960~70년대 풍경을 미니 세트처럼 재현해 놓았다. ‘미원’과 ‘금복주’ 소주병이 진열된 상회, ‘골드스타’ 간판을 단 전파사 등이 잠시나마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제천=글ㆍ사진 최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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