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악플’이라는 악

2019-10-1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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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는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철학자들 사이의 논쟁거리였다. 어느 쪽 주장이 좀 더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실험결과가 있다.

할로윈 날 가면을 쓴 아이들에게 캔디가 든 통을 주면서 한 사람이 하나씩만 가져가도록 하고 한쪽은 지켜보는 사람이 없게, 다른 한쪽은 지켜보는 사람은 없지만 거울을 설치해 놨다. 시험결과 거울이 있는 쪽 통에 든 캔디가 훨씬 덜 없어졌다. 가면을 쓴 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만 바라봤을 뿐인데도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영국 뉴캐슬 대에서 행해진 연구결과도 비슷하다. 이 대학 연구팀은 대학 내에서 자전거 절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 세 곳을 선정, “자전거 도둑들아, 우리는 너를 보고 있다”라는 글과 큰 눈 두개를 그려 넣은 사인을 설치했다. 그 결과 이들 지역에서의 자전거 절도는 62%가 줄어들었다. 비록 다른 곳에서 자전거 절도가 늘면서 전체 도난 건수는 비슷해졌지만 사람들은 그림이라도 누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는 나쁜 짓을 저지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인터넷이 사람들의 일상에 널리 파고들면서 새롭게 등장한 악이 있다. 소위 ‘악플’로 불리는 악성 인터넷 댓글이다. 인터넷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물론 자유다. 문제는 이 중 상당수가 이슈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과 저주, 욕설 등 사회적 쓰레기라는 점이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는 할 수 없는 말들을 사이버 공간에서는 태연히 내뱉는 인간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들이 이럴 수 있는 것은 익명성 때문이다. 자기 신분이 노출될 염려가 없으니 어떤 말을 해도 처벌되거나 자신을 아는 사람의 빈축을 살 걱정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 통제장치를 벗어던지고 마음껏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10여년 전 한국 최고 인기스타였던 최진실이 사망하자 국회는 사이버 모욕죄 법을 추진한 적이 있다. 최진실의 죽음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인터넷 악플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 실명제를 추진하려던 노력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의견표현에 실명을 강요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후 인터넷 악플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이버 공간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불만과 좌절을 유명인사에 대한 공격을 통해 풀려는 사회적 낙오자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가수 겸 배우 설리가 악플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성애와 노브라 등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던 설리는 한국에서 가장 악플 공격을 많이 받은 사람의 하나다. 외신들도 그녀를 한국의 보수주의와 익명의 그늘에 숨은 악성 댓글의 피해자로 애도하고 있다.

이번에도 설리의 죽음을 계기로 악플 피해를 막기 위한 인터넷 실명제 법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법안은 위헌이라는 헌재판결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네티즌들의 자발적 각성을 촉구할 수밖에 없다. 악플러들은 더 이상 자신의 찌질함과 비겁함을 드러내느라 애쓰지 말고 사회를 위해 건설적인 일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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