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종(Homo sapiens)‘이어서 그럴까, 인간에게는 표현의 욕구가 있다. 머릿속의 생각들, 가슴속의 감정들을 품기만 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기어이 표현을 하고 싶어 한다. 구석기 시대 동굴 생활 때부터 인간은 벽에 그림을 그리고 동물 뼈를 깎아 뭔가를 만들곤 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예술품으로 꼽히는 것은 독일 남부의 홀렌슈타인-슈타델 동굴에서 발견된 매머드 상아 조각상이다. 머리는 사자, 몸은 사람 모양을 하고 있어서 독일어로 ‘뤠벤멘쉬(Lowenmensch, 사자인간)’라고 불리는 이 조각상은 대략 3만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매머드가 초원을 누비던 아득한 시원의 땅, 동굴 안에서 ‘조각가’는 돌도끼를 들고 상아를 깎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를 형상화하면서 그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우리는 상상을 할 뿐 알 길은 없다.
표현은 욕구이기 이전에 본능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표현을 못하면 병이 되기도 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가 여러 문화권에 공존하는 배경은 인간의 보편적 표현본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유사한 이야기가 그리스 로마신화에 있고, 유럽 여러 지역에 있으며, 페르시아 이야기책에 나오고, 한국에서는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48대 왕인 경문대왕은 왕위에 오르자 갑자기 귀가 길어졌다.
귀가 당나귀 귀처럼 되어버린 사실을 왕은 철저하게 숨겼다.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두건 만드는 장인뿐. 장인은 이 기막힌 사실을 말할 수 없어 평생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그러다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 인적 없는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 기어이 말로써 쏟아내지 않고는 속이 답답해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임금님 귀 ~’는 단순히 귀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체제에 반하는 모든 언급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절대왕정과 독재정권 하에서 ‘표현’의 본능, 욕구 혹은 소명은 통제되었고, 이의 부당함에 대한 인식이 ‘표현의 자유’를 탄생시켰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표현의 자유는 우선적으로 존중받는 불가침의 인권이다.
미합중국 헌법은 권리장전인 수정헌법 제1조로,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인권을 다룬 제2장 제21조로 표현의 자유를 기본권적 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미국과 우리의 마음이 가있는 한국이 지금 ‘표현의 자유’로 격동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내부고발로 트럼프가 탄핵 위기에 몰렸고, 한국에서는 서초동과 광화문이 거대한 시위의 광장이 되면서 나라가 둘로 갈렸다.
내부고발은 언론의 자유, 광장은 집회의 자유를 근거로 한다. 정국은 시끄럽고 혼란스럽지만 합법적 ‘표현’들이다. 건강한 시끄러움, 건강한 혼란스러움이다.
내부고발은 영어로 ’호루라기 불기(whistle blowing)‘이다. 19세기 경관들이 호루라기를 불어 위험상황을 대중이나 동료 경관들에게 경고하던 데서 유래했다. 정부나 기업 내부에서 공공의 안전이나 공익을 침해하는 불법행위, 부정부패, 비윤리적 행위가 있을 때 이를 외부에 알림으로써 경고한다는 의미가 있다. 트럼프가 정보당국 관계자로 알려진 내부고발자의 제보로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발목이 잡혔다. 탄핵조사가 하원에서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상원을 공화당이 잡고 있으니 결말이 어떻게 날지는 알 수가 없다.
미국에서 내부고발은 독립선언 직후부터 법으로 보호받으며 사회정화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해왔다. 가장 유명한 내부고발자는 딥 스로트(Deep Throat). 워터게이트 스캔들 제보로 닉슨을 사임하게 만든 그는 사건 발생 30여년 후, 사망 3년 전인 2005년 스스로를 공개했다. 마크 펠트 전 연방수사국 부국장이었다. 내부고발이 없었다면 밝혀지지 않았을, 그래서 바로 잡아지지 않았을 어두운 역사의 한 부분이다.
한국의 조국 시위는 규모가 박근혜 탄핵시위를 넘어설 기세이다. 시위는 더 이상 조국 장관 개인에 대한 찬반이 아니라 문재인 정권 찬반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는 ‘검찰개혁 즉 조국 지지’, 광화문에서는 ‘조국 사퇴 즉 문재인 반대’ 시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인근 지역주민들은 시위 때문에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집회금지’ 국민청원을 할 정도이다. 집회 시위가 표현의 자유로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라면 주민들의 생활권, 생존권도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택시 안에서도, 식당에서도 말을 조심해야 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광화문과 서초동을 사람의 바다로 만들 만큼 ‘표현의 자유’는 확립되었다. 이제 여기서 어디로 갈 것인가. 언제까지 광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한국이 민주국가로서 한 단계 더 성숙하기를 바란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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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