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벌금의 징벌효과

2019-09-20 (금) 1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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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핀란드 최고기업인 노키아 부회장이 할리 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타고가다 과속으로 걸려 11만6,000유로의 벌금을 내 화제가 됐다. 한화로 1억5,000만원에 가까운 거액이다. 벌금은 그의 14일치 봉급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군소리 없이 벌금을 냈다.

노키아 부회장에게 이처럼 거액의 벌금이 매겨진 것은 핀란드가 ‘일수벌금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일수벌금제란 위반의 경중에 따라 일수를 정한 뒤 소득에 따라 하루 벌금을 정해 곱하는 방식이다. 똑같은 위반을 해도 수입 정도에 따라 벌금액이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난다.

이와 달리 소득과는 관계없이 동일 범죄 혹은 동일 위반에 같은 액수의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총량벌금제’라고 한다. 한국과 미국은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가령 과속운전을 하다 적발되면 경제적 수준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수백 달러의 벌금이 날아온다. 하루하루 벌어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런 벌금은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큰 부담이지만 자산가에게는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벌금의 기본취지가 징벌과 재발 방지에 있다면 이런 벌금제도는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라 보기 힘들다. 그래서 총량벌금제가 안고 있는 징벌효과의 한계를 이유로 점차 많은 나라들이 일수벌금제를 채택하거나 고려하고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아주 오래 전인 20세기 초부터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독일과 프랑스 등도 수십 년 전 일수벌금제를 도입했다.

일수벌금제가 제대로 시행되려면 소득수준이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핀란드 같은 나라는 모든 국민들의 소득을 전호번호부에서 번호 찾듯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나라에서는 경찰이 교통위반 차량을 세운 후 운전자에게 “당신 소득이 얼마냐”고 가장 먼저 묻는다. 일수벌금제를 시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의 투명성과 신뢰수준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도 수년 전부터 완전 일수벌금제는 아니더라도 재산상태에 따라 벌금 액수를 차등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해왔다. 그런 가운데 18일 집권여당과 법무부가 당정협의를 통해 ‘재산비례 벌금제’ 도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행위불법 및 행위자의 책임 기준으로 벌금일수를 정하고 경제적 사정에 따라 벌금액을 산정하는 재산비례 벌금제를 도입해 불평등한 벌금제도를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일수벌금제와 유사한 형태의 제도로 보인다. 하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경제적 사정을 판단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논란이 예상된다. 또 ‘조국 정국’ 속에서 얼마나 강한 동력을 얻을 수 있을지, 사사건건 발목 잡는 야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지켜봐야 한다.

그래도 일단 방향은 옳게 잡았다고 평가할 만하다. 한국사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인식에 크게 멍들고 있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벌금액을 달리하는 제도를 시행한다면 이런 피해의식을 완화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보다 더 공정성에 부합하고 벌금의 징벌효과를 한층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보다 앞서가는 게 꽤 있는 데, 재산비례 벌금제도가 시행된다면 이것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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