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토론토의 ‘기생충’

2019-09-14 (토)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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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의 ‘기생충’
토론토니안들 진짜로 영화 좋아한다. 우중에도 극장 앞은 장사진을 치고 배우와 감독이 참석하는 갤라상영의 입장료가 1인당 76달러인데도 극장은 초만원이다. 자원봉사자 수만 3,000명이다. 온 도시가 영화제 열기로 달아올라 다소 쌀쌀한 가을공기를 달래 주는듯했다.

며칠간 토론토영화제에 다녀왔다. 하루 종일 배우와 감독 인터뷰와 영화관람 그리고 파티에 참석하느라 몸과 마음이 곤죽이 되는 강행군이다. 너무 피곤해 영화를 보면서 깜빡 깜빡 조는데 매번 ‘내년엔 안 온다’고 다짐하면서도 영화제가 가을 수상시즌을 여는 중요한 것이어서 또 참석했다.

영화제서 올 칸영화제 대상수상작인 ‘기생충’(Parasite)의 감독 봉준호(사진)와 극중 부자로 나온 송강호와 최우식을 만났다.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와 연예전문지 할리웃 리포터가 공동으로 마련한 파티에서였다. 봉감독과는 구면이어서 서로 손을 꼭 잡고 등을 치면서 반갑게 재회했다.


내가 그에게 “‘기생충’은 우리 회원들이 모두 극찬을 해 내년 1월에 열리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타고 오스카상도 탈 가능성이 많다”고 말하자 봉감독은 “감사합니다”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봉감독은 사람이 겸손해 정이 가는데 우리 회원들에게도 인기가 좋아 서로들 그를 만나겠다며 내게 소개를 부탁했다. 일본인 동료회원 유키는 내게 “봉준호의 머리가 유난히 큰데 아마 그래서 뛰어난 상상력이 나오는 것 같다”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가 자랑스러웠다.

송강호와 최우식을 만났다. 앳된 얼굴의 최우식이 손에 술잔을 들고 있어 “술 마셔도 될 나이냐”고 물었더니 “저 서른 살입니다”며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연기 경력이 9년 이란다. 영화에서 사기꾼 가족 김씨네의 가장으로 나온 송강호도 서민적이요 겸손했다. 먼저 그에게 “칸영화제서 대상을 타리라고 기대했었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안 그랬으나 관객의 반응이 너무 좋아 상을 탈 가능성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고 대답했다.

영화에서처럼 한국에서 빈부차가 극심한가”라고 물었더니 그런 상황은 어디서나 있는 일이지 않겠느냐“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어 ”영화에서처럼 한국에서는 요즘 자영업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알려줬다.

내가 물었다. 김씨네가 비록 가난에 쪼들리긴 하지만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남을 속이고 사기 치는 대신 막노동이라도 해 정직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에 송강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라는 표정.
‘기생충’은 우리 회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한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다소 부정적 평을 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이 영화는 열이면 열이 다 좋다고 한다. 그래서 봉감독과 송강호에게 내년 1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다시 만나자고 다짐했다.

며칠간 인터뷰한 배우와 감독은 탐 행스와 제니퍼 로페스 및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 모두 24명. 로페스는 13일 개봉한 실화 ‘허슬러’(Hustlers)에서 뉴욕의 스트립클럽 댄서로 나와 콘스탄스 우 등 동료들과 함께 월스트릿에서 일하는 남자들의 껍데기를 벗긴다. 그는 인터뷰에서 영화를 여성파워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내가 보기엔 범죄행위자들을 보고 파워우먼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평범한 오락영화다.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받은 영화가 탐 행스가 인기 아동 TV프로 사회자인 미스터 로저스(프레드 로저스)로 나온 ‘이웃의 아름다운 날’(A Beautiful Day in Neighbor). 행스가 기막히게 아름답고 민감한 연기를 하는데 주위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눈물을 찔끔 찔끔 흘렸다.

영화의 여류 감독 마리엘 헬러에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울음을 참느라고 애를 쓰던데 당신도 영화를 찍으면서 울었느냐”고 물었더니 “나뿐 아니라 제작진도 모두 많이 울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인터뷰 후 사진을 찍을 때 헬러는 내게 “그 질문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찬탄을 금치 못한 영화가 이혼문제를 다룬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다. 노아 바움박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각본을 쓰고 연출하고 스칼렛 조핸슨과 애담 드라이버가 주연하는데 어린 아들을 둔 두 젊은 부부가 이혼 수속을 밟으면서 겪는 시련과 갈등과 그 후유증을 지극히 사실적이요 통렬하게 다루었다. 사랑하던 두 사람이 헤어지는 과정을 어찌나 가차 없이 파고드는지 보는 사람의 가슴이 아플 지경이다.

감독은 이런 아프고 슬픈 얘기 중간 중간 깔깔대고 웃게 되는 코믹한 장면과 대사를 삽입해 영화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긴장감과 통증을 이완시켜주고 있다. 올 해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작품과 감독 및 각본 그리고 남녀주연상과 함께 각기 두 부부의 변호사로 나오는 로라 던과 레이 리오타가 조연상 부문에서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상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는 역시 부부의 이혼 문제를 다룬 잉그마르 베리만의 ‘결혼 모습’(Scenes from a marriage)을 생각나게 만든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서 박수갈채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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