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책 속의 풀꽃

2019-09-14 (토) 박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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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면 늘 문제가 되는 건 책이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온 적지 않은 세월동안 사서 모은 책들도 많지만, 선배나 동료 작가들이 보내준 책들이 책장의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이번에도 문학전집이나 단행본, 인문, 신앙에 관한 책들이 여러 박스로 포장되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땀을 흘리며 책 박스를 나를 때 사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내용이 다 내 머릿속에 저장돼 있지도 못하면서 괜히 그들을 힘들게 하는구나 싶었다.
이사를 할 때면 솎아내고 양을 줄여보는 책이지만, 매달 한국에서 오는 문학지와 이래저래 쌓이는 책들은 늘 물리적, 정신적 부담이면서도 나에겐 더없이 소중하다. 그 많은 책 중에 겨우 다섯 권으로 꽂힌 내가 쓴 책들이 나의 세월이며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성과라 생각하면, 조금 뿌듯하면서도 왠지 쓸쓸해지기도 한다.

새 집에 들어와 짐을 정리하는 우선순위는 일단 부엌과 생활용품 정비이고 책은 맨 마지막으로 밀린다. 이제 짐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집 꼴이 갖춰지자, 책 박스들을 뜯고 정리를 시작한다. 이번엔 좋아하는 책들보다 읽지 못한 책들을 먼저 고른다. 그 책을 쓰느라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쳤을 동료 작가들의 책을 차근차근 다 읽어보리라 결심한다. 읽어야 할 책들과 써야만 할 글들에 뒤로 밀려갔던 지인 작가들의 책엔 어김없이 그들의 서명이 되어 있고, 더러는 한두 줄의 다정한 글도 적혀 있다.


올 가을엔 시도 틈틈이 읽어보리라는 생각에 얇은 시집들을 펼쳐보다가, 분홍 꽃이 그려진 나태주 시인의 시집에 손이 멈춘다. 뒤표지 접힌 부분에서 그의 친필 편지를 발견한다. 시인이 직접 그린 장미가 인쇄된 노트 반 장 정도의 하얀 종이에 달필로 써내려간 그의 글에, 오래전의 기억을 되새겨 본다.

13년 전 가을이었고 그날 저녁은 타운 신문사 강당에서 행사가 있었다. 나는 그날 나태주 시인의 시 한편을 낭송하기로 해서 그의 시 중에서 ‘금산 옛길’을 골랐다. 내 고향의 옛길이라 낭송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날은 고향집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둘째 오빠의 2주기여서 그 시가 더 다가왔다. 시를 낭송하고 난 뒤 잠깐 내 심정을 얘기하고 자리로 들어오는데, 사회를 보던 선배의 말이 선뜻 뒤통수를 쳤다. 다음 낭송할 사람부터는 시만 낭송하고 들어가라고. 무안한 마음에, 그날 독자를 자청하며 나를 만나기 위해 거기 참석했던 고향 어르신과 행사장을 나와 버렸다. 행사 진행을 맡은 사람으로서 시간을 맞추어야 할 책임에 하는 소리인 줄 알았지만, 나를 잘 챙겨주던 선배였는데 싶어 좀 섭섭했다.

다운타운에서 저녁을 사겠다는 고향 어르신의 자동차는 내 앞에서 달려가고 나는 익숙지 않은 길을 운전하며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무렵 핸드폰이 울렸고, 사회를 보던 선배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참았으면 행사를 끝내고 그 자리를 나왔을 테고 선배도 나도 서로 어색하지 않았을 텐데 싶어 몇 마디를 주고받던 순간, 내 뒤를 따라오던 사설 앰뷸런스가 갑자기 사이렌을 울리며 옆 차선으로 빠지려다 내 차를 치고 말았다. 한 달밖에 한 된 새 자동차는 범퍼 한쪽이 떨어져 나가고, 나는 당장에 허리에 통증을 느끼며 머리가 아파왔다. 서행을 하던 내 뒤를 따라오던 젊은 기사가 환자도 없는 빈 앰뷸런스의 사이렌을 울리며 추월하려다 낸 사고였다.

그 사고로 MRI 촬영에서 목과 허리에 디스크 판정을 받았던 나는 오늘도 스트레칭으로 통증을 극복하는 삶을 살고 있다. 시인의 편지엔 그날 자신의 시 ‘금산 옛길’을 낭송해 주어서 놀랍고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내가 일찍 자리를 떠버린 것이 섭섭하다고 쓰여 있다. 시인이 그날 그 자리에서 계셨다는 기억도 희미한 지금, 조금 참았더라면 행사를 끝내고 시인과 악수라도 나누었을 것이고, 어쩌면 뒤풀이 자리에까지 가 더 담소할 수 있었을 것이고, 괜히 다운타운의 스시 집을 찾아가는 중에 사고를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늘도 허리통증을 극복하기 위해 귀찮은 스트레칭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후회가 꼬리를 문다.

‘풀꽃’이란 시로 유명한 시인의 존함을 더러 방송에서 들을 때면 그 단아한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시인은 안녕하신가, 새삼 혼자서 안부를 물어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그 짧은 시를 읊조리며, 내가 쓰는 글들도 단박의 화려함보다는 자세히 오래 볼수록 진실이 우러나오는 그런 작품들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박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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