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하철에서 생긴 일

2019-09-07 (토) 12:00:00 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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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북핵 폐기 문제로 미국과 줄다리기를 하던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오지랖 넓은 중재자 노릇을 고만두라”고 한 발언이 보도된 적이 있다. 원래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주제 넘는 행동이란 게 요체인 듯하다.

나는 오지랖 넓은 경우란 걸 딱히 당해보지 않고 살아왔는데, 얼마 전에 톡톡히 체험했다. 어느 날 친구와 헤어져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한 쪽 귀가 몹시 가려워 무심코 긁고 있는데 내 앞에 서 있던 늙수그레한 여자가 그런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슬그머니 손을 떼고 딴청을 부리다가 그녀가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는지라 가려움이 가시지 않는 귀에 손이 다시 올라갔다. 그런데 그 여자가 또 쳐다봤다.

마침내 옆자리가 비자 그 여자가 냉큼 내 옆에 붙어 앉았다. 그런가보다 했는데 갑자기 가마솥을 긁는 듯한 투박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봐 하니 나이도 있구만. 어린애도 아니고 귀를 그리 빡빡 긁어대면 우짜누. 귀가 시뻘건 게 보기 싫구먼. 약을 바르면 될 걸 무슨 짓이여. 쯧쯧.” 나는 불의의 일격을 받고 몹시 당황한데다가 주변 승객들의 쏠리는 시선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얼떨떨한 상태에서 모기소리만 한 목소리로 “앨러지가 있어 가려워서요,”라고 변명을 했다.


그녀는 “그러니께 약방에 가서 약을 사 바르란 말이여. 나도 전에 그랐는데 약 바르니께 싹 낫더구먼”하고 한 방을 더 먹였다. 이러다간 무슨 봉변을 더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걸 모면하는 길은 오로지 다음 역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뭇 시선을 피해 일어서면서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그런데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나를 보고 씽긋 웃는 거였다. 나도 웃을 수밖에…

오 헨리의 ‘마녀의 빵’이란 단편소설에 보면 빵가게를 운영하는 마더 미첨이란 40대의 노처녀가 나온다. 그녀의 가게에는 허름한 옷차림의 중년남자가 자주 와서 구운 지 하루 지난 묵은 빵을 사가곤 한다. 그녀는 그 남자가 가난한 화가일 걸로 짐작을 한다. 그에게 관심이 생긴 그녀는 어느 날 그가 사놓은 빵 속에 몰래 버터를 듬뿍 발라서 싸준다. 그 남자가 그 빵을 맛있게 먹으리라 상상을 하고 있던 차에 청천벽력이 떨어진다.
그 남자가 들이닥쳐 다짜고짜로 “이 멍청한 암 코양이 같으니라고. 네가 나를 망쳐 버렸어. 주제넘게 왜 그따위 짓이야!” 화가 잔뜩 나서 소리를 지른다.

실은 그 남자는 화가가 아니라 건축 설계사였다. 3개월에 걸쳐 시청에 응모할 건축 설계도를 완성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연필 자국을 그 묵은 빵으로 지웠는데... 버터를 먹인 빵이 완성된 잉크 설계도를 뭉개놓은 것이었다.

오지랖이 넓은 행위는 그것이 선의에서였건 아니건 주제 넘는 행동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지금 오지랖이 무조건 안 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하철을 타보면 누구나 느끼듯이 아무도 남의 일에 관심도 없고 시선도 안 준다. 오로지 남녀노소 스마트 폰에 코를 박고 있다. 젊은이들은 노인을 봐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훈화는 꼰대 짓으로 폄훼된다. 식당에서 뛰어 돌아다니는 아이를 나무라면 그 부모는 자기 아이 기죽인다며 오지랖 넓은 짓으로 치부한다.

어느 심리학자는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행동이 남을 통제하거나 자기애를 과시하는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관계에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작용되서 선의든 악의든 남이 자기 영역에 발을 들여 놓으면 일단 반발하고 본다는 것이다. 청개구리 심보가 바로 그거다. 이런 풍조는 한때 유행하던 “너나 잘 하세요”로 상징된다. 과연 그래야 할까?

나는 오지랖 넓은 행동이 그리 크게 거부당하거나 문제되지 않는 시대를 살았다. 우리 이웃이 모두 사촌인 때가 있었다. 그 집에 수저가 몇 개인지 훤히 알 정도로 터놓고 지내며 남의 제상에 밤 놔라 대추 놔라 오지랖을 펼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선의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모든 오지랖 행동이 비난 받는 시대, 그것도 각박한 현실의 한 면목이다.

<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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