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인 후보와 한인 유권자

2019-08-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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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시 12지구 시의원 보궐선거의 개표가 진행되던 지난 13일 밤, 존 이 후보의 넓은 포터랜치 캠페인 오피스에서는 한인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존 이 당선자의 가족 몇 명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한인은 기자들뿐이었다.

캠페인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인 자원봉사자들이 가가호호 캠페인에 참여하고 전화기에 매달리던 다른 한인후보들의 선거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후보를 시의원으로 선택한 것은 지역구 주민들이었고, 캠페인도 그들이 발 벗고 나섰다. 개스 누출 사건이나 노숙자 문제 등 지역현안 해결에 가장 믿음이 가는 정치인이 그였기 때문이다.


LA시 12지구는 할 번슨 전 시의원부터 그렉 스미스, 미치 잉글랜드에 이어 존 이 당선자까지 전임 시의원의 수석보좌관이 자리를 이어받는 관행이 4대째 이어지고 있다. 기성 정치인에 염증을 느끼는 유권자도 적지 않았지만 지역 주민들은 이 당선자를 택했다.

30여 년 전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이 처음 다이아몬드 바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한인들은 그가 누구인지, 선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그는 슬그머니 나와 당선됐다. “시장과 시의원들이 나오라고 해서 나간 거예요. 선거운동도 그 사람들이 다 했어요.” 당선 후 김 전 의원이 했던 말이다.

60번과 57번 프리웨이가 만나는 다이아몬드 바는 교통문제가 만만치 않던 곳. 시의원들은 대형 엔지니어링 회사를 운영하던 김 전의원의 지식과 노하우가 시정에 필요했다. 김 의원은 당선됐고, 당시 한인들의 성원과 지지가 몰렸던 세리토스 시의원 선거의 한인후보는 패했다.

이번 선거에서 한인들은 특별히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뒤에서 조용하게 표로 밀었다.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었다는 분석이다. 얼마나 많은 한인유권자가 실제로 투표했는지는 좀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투표율이 현저히 낮은 휴가철 보궐선거여서 한인 표가 상당히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 제기된 한인은 한인을 지지해야 하는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사 사례는 이미 있었다. 지난해 부에나팍 시의원 선거 당시 그 지역의 한인 정치인은 한인후보 대신 당이 같은 상대 후보를 밀었다. “아무리 한인이 출마했어도 오랜 친구를 배반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보도됐다.

한인사회의 정치력이 신장되고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어질수록 유사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다. “한인이 타인종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생소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흑인이니까 흑인인 당신은 나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한인사회에서도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선거출마 경험이 있는 한 한인은 말했다.

앞으로 한인 정치인들은 단지 한인이라는 이유로 표와 기부금을 부탁하는 차원을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가 남이가’ 식의 캠페인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신 이슈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힌 후 당당하게 지지를 호소하고, 입장이 다르면 거부하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 이 당선자의 임기는 전임자의 잔여임기인 1년 4개월 정도. 당장 내년 3월에 예선, 11월에 또 다른 결선이 기다리고 있다. 당선의 기쁨은 잠시, 돌아서면 바로 선거준비를 해야 할 판이다.

대선과 함께 치러질 내년 LA시의원 선거는 이번 보궐선거와는 판이 다르다. 12지구는 공화당 지역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민주당 유권자가 6대 4 정도로 많은 곳. 존 이 후보의 당선은 모처럼 LA 한인사회가 맞은 경사인데 이 기쁨을 이어가려면 더 치밀한 전략과 지혜를 모으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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