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과도한 ‘애국심의 잣대’

2019-08-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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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추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 스토리를 한창 써내려가고 있었다. 잘 치고 잘 달리고 잘 던지는 그는 완벽한 선수를 뜻하는 ‘5종 세트 플레이어’로 불리며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박계약을 꿈꾸는 추신수 앞에는 큰 걸림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병역이었다. 병역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구단 입장에서 선뜻 장기계약을 내놓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추신수가 이 문제로 고민한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병역에 관한한 추신수는 불운의 사나이였다. 2006년 아시안 게임 때는 대표로 선발되지 못했고 한국이 금메달을 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는 구단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로서는 병역면제 혜택을 받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미국 영주권을 취득해 선수생활을 계속하면서 군 문제를 연기하는 걸 고민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왔고 구단에서 시민권 취득을 권유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다행히(?) 추신수가 마지막 기회였던 2010년 아시안 게임에 대표로 뽑히고 금메달을 받으면서 그의 병역문제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하지만 2009년 추신수에게 병역을 둘러싼 선택은 결코 가벼운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설사 합법적 방법으로 미국에서의 선수생활을 연장한다고 해도 한국인들의 정서가 이를 이해해 주리란 보장이 없었다. 추신수가 가졌던 고민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추신수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줘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 이 칼럼이 한국의 한 포탈에 게재되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며 갑론을박이 이어졌던 기억이 있다.
이처럼 국적과 병역은 한국사회에서 무서운 폭발성을 지니고 있는 이슈이다.

그러더니 이번에 느닷없이 추신수의 두 아들이 한국국적을 포기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금년 14살과 10살인 두 아들이 법무부 절차를 거쳐 한국국적 이탈을 한 것이다. 추신수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었으며 아이들이 “한국도 좋지만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밝힘에 따라 필요한 절차를 밟은 것뿐이라며 아이들의 국적포기에 쏟아지는 비난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부 네티즌들은 유승준 케이스까지 언급하며 추신수 아들들의 국적포기가 병역면탈을 위한 것이라 비난하고 있다. 옮기기 힘든 막말도 쏟아낸다. “두 아들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추신수는 자신이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사실을 한번쯤 생각했는지 되묻고 싶다”며 점잖게 꾸짖는 언론도 있다. 물론 이 결정을 옹호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이쯤에서 좀 냉철하게 돌아봐야 할 포인트가 있다. 국적포기 결정의 당사자는 추신수가 아니라 그 아들들이다. 아들들은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분명히 밝혔고 추신수는 이런 아이들 의사에 따라 절차를 밟은 것이다. 아버지 추신수의 삶이 아닌, 그의 아이들 미래와 관련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어떤 위법적 요소도 없다. 정서적으로 마뜩치 않을 수는 있겠지만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할만한 이슈는 전혀 아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보호받아야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매년 수천 명이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있다. 두 아이가 유명한 아버지를 두지 않았다면 국적이탈을 했다고 여론재판에 회부될 일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어린 아이들이 미국에서 살고 싶다며 내린 결정에 애국심의 잣대까지 들이대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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