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험난한 총기규제의 길

2019-08-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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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4일 코네티컷 뉴타운의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다. 20살 난 정신질환자가 어머니를 죽이고 학교로 가 26명을 죽이고 자살한 것이다. 이중 20명이 6살에서 7살 난 아이들이었다.

무고한 어린 생명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이 사건은 전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이번만은 미국의 수치인 총기 난사사건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될 것이란 기대를 안겨줬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으로 끝나고 말았다. 총기구입자의 백그라운드를 체크하자는 것을 골자로 한 지극히 초보적인 단계조치인 법안조차 연방상원의 필리버스터 문턱을 넘기 위해 필요한 60표에서 다섯표가 모자라는 바람에 사장되고 말았다.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살상 사건으로는 역대 최악인 샌디훅의 참상을 목격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정치권을 보고 대다수 미국민들은 사실상 총기규제의 꿈을 버렸다.


지난 주말 오하이오와 텍사스에서 연이어 총기 난사사건이 발생해 모두 31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텍사스, 엘파소에서 22명을 죽인 패트릭 크루시어스는 21살 난 반이민 인종차별주의자로 이런 확신을 담은 문서를 인터넷에 올렸다. 오하이오, 데이턴에서 9명을 죽이고 죽은 코너 베츠는 극좌이념에 물든 경찰 증오주의자로 반파시스트 단체인 ‘안티파’를 지지하는 트윗을 날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량 총격사건은 미국에서 올 들어 17번 발생했다. 거의 보름마다 한번 씩 터지는 셈이다. 지난 5월까지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은 51명으로 작년과 같았으나 최근 사건으로 올 사망자 수는 102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총기규제법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과거 반드시 될 것으로 믿었다가 실망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는 총기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트럼프는 형식적으로 백인 우월주의와 증오범죄를 규탄하고 총기규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듯한 말은 했으나 얼마나 진심이 담겨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번에 텍사스에서 총기를 난사한 크루시어스의 ‘히스패닉들이 미국을 침공하고 있다’는 발언은 과거 트럼프 얘기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과거에도 총기규제를 할 것처럼 제스처는 취했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지지기반인 전국총기협회와 보수적인 백인들이 이를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총기난사의 원인은 총이 아니라 정신질환자와 증오라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전문가들은 이번에 통과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것은 소위 ‘빨간 깃발’로 불리는 총기 규제 법안으로 보고 있다. 이 안은 법원으로 부터 자신이나 남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정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총기를 압류하거나 구입을 금지하도록 하는 법안을 주 정부가 제정할 수 있도록 연방정부가 그랜트를 준다는 것이다. 대량 살상을 막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내용이지만 그나마 통과된다는 보장도 없다.

미국에서 대량살상을 막기 위해서는 대량살상 이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할 수 없는 공격용 무기의 판매가 금지 돼야 하고 이미 미국에 퍼져 있는 4억정의 총기를 수거하는 일이 시작돼야 한다. 둘 다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닌데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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