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면초가

2019-07-25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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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testing the water’라는 표현이 있다. 수심이 너무 깊지는 않은지, 들어가기에 너무 차지는 않은지, 일을 벌이기 전에 상황을 살펴본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간 보기’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이번 주 러시아와 중국 군용기들이 한국 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 진입한 사건을 놓고 그 의도가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얼핏 보면 복잡할 것 같지만 실상은 간단한 문제다. 최근 한일 갈등이 심화되면서 전통적 우방인 한미일 동맹이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는지 테스트 해보려는 심산인 것이 뻔히 보인다.

최신형 초계기를 독도 인근 상공에 두 번이나 침입하게 해놓고 러시아 대사관의 차석 무관은 기기 오작동으로 둘러댔다. 정보수집이 생명인 초계기가 기계장치 이상으로 두 번이나 한국 영공을 침범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 진단이다.


러시아 정부는 여기서 한술 더 떠 자국 군용기가 한국 영공을 침범하지 않았다는 공식서한을 한국 측에 전달했다. 이와 함께 무관의 해명은 개인의견으로 격하됐다. 러시아는 오히려 한국 조종사들이 자국 비행기의 항로를 방해하고 안전을 위협하는 비전문적 비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적반하장도 이쯤 되면 신의 경지다. 한국은 러시아 정부에 강력 항의했다고 하는데 러시아가 콧방귀나 뀌었을지 의문이다.

러시아의 한국 무시는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2017년 블라디보스톡까지 달려가 북한 제재강화에 동참해 달라던 문재인 대통령의 요청을 면전에서 거절한 푸틴은 지난 5월 오사카에서는 문 대통령을 2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다.

러시아와 같이 한국 영공을 침범한 중국은 관영매체를 통해 러시아가 한국 영공 침범 사실이 없다며 러시아를 두둔하고 오히려 한국 보고 “용어를 가려 써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일 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한국이 유일하게 기댈만한 나라인 미국조차 러시아의 한국 영공 침범에 대해 ‘영공’이란 말을 썼을 뿐 누구 영공인지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한국정부가 국제기구를 통해 주겠다는 식량 전달을 거부하고 억류된 러시아 선박 승선 한국인 선원 인도 요청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러시아 국적 어선 ‘샹 하이린’이 기관고장으로 북측 수역에서 표류하다 북한에 억류됐는데 북한은 러시아 측과는 신속히 송환 협의에 들어갔으나 한국 선원을 돌려달라는 9차례에 걸친 한국정부 요청은 계속 깔아뭉개고 있다.

대다수 한국민들은 한일 분쟁에서 한국의 입장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미국은 한국 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일본보다 클 수 없다. 거기다 트럼프는 대선 유세 때부터 한국은 안보에 무임승차 하고 있으며 한국이 방위비 부담을 올리지 않으면 미군은 한반도에서 발을 뺄 수도 있음을 시사한 인물이다.

이 와중에 지난 주 문 대통령과 만난 5당 대표 중 황교안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본과 맺고 있는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한국 안보의 기본 틀인 한미일 동맹을 깰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한미일 동맹이 무너지면 한국은 핵으로 무장하고 똘똘 뭉친 러시아와 중국, 북한을 혼자 상대해야 한다. 한국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가. 사면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초가 소리를 듣고 있는 항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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