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39대 Jimmy Carter 대통령 (4)

2019-07-2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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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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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ter는 전 세계를 향한 인권옹호선언의 일환으로 언급한 쏘련의 인권탄압 비판 과 쏘련안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찬양이 쏘련의 강력한 반발만을 초래하는 비생산 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임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가 제안한 군축제한 협상은 미국의 이익 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쏘련의 거부를 당했었다. 마침 미국이 저공비행장 거리유도 missile 을 생산하기 시작했던 때이었음으로 쏘련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 Carter 는 1977년 7월경부터 쏘련의 인권탄압에 대한 언급도 자제하며 쏘련과 의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Carter 이러한 태도의 변화에 쏘련도 차츰 적극적으로 대응해 와서 detente 의 가능성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미쏘 양국의 군축회담이 시작되었고 1979년 6월에 Carter 와 Brezhnev 는 Vienna 에서 양국의 군비제약을 약속하는 SALT II 에 서명하게 되었었다.


전 세계지도를 쳐다보면 소학생이라도 Suez 운하와 Panama 운하가 세계무역에 가지는 중요성을 곧 알수있다. 또 만일Panama 운하가 없었다면 미국의 통상과 국방에 얼마나 지장이 있었겠는지를 알수 있게된다.

이것을 깨달은 미국은 19세기말에 원래 Colombia 의 일부이었던 지역의 주민들을 충동시켜서 Panama 로 “독립”하게 만든후 그곳에 Panama 운하를 미국의 돈으로 건설한다. 이지역을 “영구히 통치” 할수만 있다면 운하의 “국적”이나 “영유권”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미국은 생각하였었다.

그때 당시의 가장 “합리적”인 구상에서 신생 Panama와 철통같은 “국제조약”을 맺어서 Panama 운하가 미국의 영구적인 통치하에 있게될 것으로 생각하고 시작된 일이었는데 그동안에 이 세계는 “힘”만 가지고 남을 “정복”하고 영구”통치”를 할수는 없는 세계로 변질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동전에 양면이 있는 것임으로 Panama 국민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한번 보기로 하자.
나라의 “재산”이라고는 운하 하나밖에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운하의 실질적인 주인은 미국이고 Panama 국민들은 자기 나라에서 영원히 외국인 상전의 눈치를 보는 종업원 으로나 일하도록 되어있다면 계속 굴종만은 할수없는 일이었다.

1903년에 체결된 양국간의 조약으로 “Canal Zone” 이 형성되어서 미국이 “영원히” 통치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Yankee go home!” 이라는 절규와 함께 1964년에 것잡기 어려운 유혈폭동이 일어났었다.
당시의 Johnson 대통령은 1903년도의 불평등한 조약들이 지속될수 없는 것임을 감지하고 Panama 와 새조약체결 협상을 시작하였었다. 난항을 계속하던 협상은 Carter 가 대통령에 취임할때까지 타결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Carter 가 대통령에 취임한 해인 1977년 8월에 양국은 두개의 새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하였다.
첫째조약으로 미국은 1999년 12월 31일 정오에 운하의 통치권을 Panama 에 이양 하기로 하였다.

그때까지는 운하를 미국과 Panama 가 공동운영하기로 하였으며 Panama 가 받아오던 운하통행료의 지분을 대폭 인상하기로 하였다.
둘째조약으로 1999년 이후에는 Panama 운하가 모든 항해선박에 개방되는 중립적 운하가 되도록 하였고 미국은 “중립성 유지”를 보장할 권한을 영구히 갖도록 하였다.
Carter 는 새조약들이 맺어지도록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협상에 깊히 개입하지도 않았었지만 상원이 새조약들을 비준하도록 적극 노력하여 1978년 3, 4월에 새조약 들이 비준 되었었다.


Panama 와의 새조약 체결은 미국과 다른 남미제국과의 친선이 증진되도록 하는 좋은 효과도 있었으나 Panama 운하 건설의 동기, 유래, 역사등에 대해서 깊은 사정을 잘 모르는 대부분의 미국사람들은 “우리의 돈으로 우리가 건설한 우리의 운하를 왜 그렇게 쉽게 내어주느나?” 라고 불평하면서 Carter 외교의 또다른 “실패”라고 비난 하였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판에 쏘련이 연합군으로 참전하여 공산, 자본주의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손을 잡았던것도 잠시 이었을뿐 종전 이후에는 미국과 쏘련이 냉전으로 열전 못지않게 대립하기 시작한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의 구상에 따라 비공산권 국가들과 방위동맹조약들을 맺어서 쏘련의 “세계공산화 전략”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Pacto Mania” 라고도 불렸었던 전략에 따라 설립 되었던 방위조약기구 들인 SEATO (동남아) 는 1977년에, 원래는 MEATO 라고 불렸던 CENTO (중동) 은 1979년에 각각 폐기되었다.
쏘련과 동구의 쏘련위성국가들에 대비하여 설립된 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는1966년에 불란서가 탈퇴함에 따라 본부를 Paris 에서 Brussel 에 옮겼는데 1974년에는 Greece도 탈퇴하였다. NATO 는 원래의 설립목적대로 잘 유지되고 있는 편인데 근래에 Trump 대통령이 가맹국들이 NATO 의 비용을 더 부담하여야 한다고 주장해서 다소의 불협화음도 들린다.

오늘의 세계는 공산, 자본주의 이념을 따르는 국가들만 있는것이 아니고 유럽, 아시아, 남미, Africa 에 “제3세계권”들의 나라들도 있어서 미쏘 양진영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로선을 가는 나라들도 있다.

또 세계는 자원을 과분하게 쓰고있는 선진국가들과 미개발, 개발도상국들로도 구분되어 후진국들은 이념과 상관없이 원조를 많이 해주는 쪽을 따르기도 한다.
따라서 미국과 쏘련의 지도자들도 국제정세 를 앞에서 이끌어 가기 보다는 변화에 대응하기에 바쁘리라고 생각된다. 1970년대에는 공산권안에 서로 적대, 불화하는 쏘련과 중국의 분열이 있었고 서방쪽에도 미국과 대립하여 European Community 가 설립되어 국제관계는 더욱 복잡해 졌었다.

중동지역은 1970년대에도 일촉즉발의 화약고 같은 위험지역이었다. Israel 이 미국의 강력한 조종으로 1948년에 UN 의 승인아래 건국이 된후 그땅에서 몇천년째 살아오던 Palestine 인들은 그야말로 하루밤 사이에 땅을 빼앗기고 주변의 Arab 국가 들에 난민으로 옮겨 가거나 아니면 투표권도 없는 Israel 의 “3등시민”들이 되었었다.

Palestine 인들은 PLO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을 구성하여 내전을 시작 하였으며 Israel 은 주변의 모든 Arab 국가들과 원수같은 관계에 빠져 들게 되었었다. 쏘련이 Israel 주변의 Moslem 국가들과 친교를 맺기 시작하면서 중동에서 튀어나는 불꽃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쉽게 확산될수 있지 않을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 었다. Egypt 가 패전한 Egypt 와 Israel 간의 전쟁도 1967년에 일어 났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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