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라니

2019-07-19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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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미국에서 19세기 초반 처음 등장했다. 1863년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하기 30~40년 전부터 북부에서는 노예제도가 상당히 폐지된 상태였다. 자유인이 된 흑인들에게 백인 목사나 정치인들은 ‘귀향’을 권했다고 한다.

조부나 아버지가 노예로 끌려오기 전 살았을 서부 아프리카 본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이었는데, 좋은 의도였다 하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너희’는 이 땅의 소속이 아니라는 것, 결코 ‘우리’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민자를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미국 본토박이를 자처하는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들은 1840년대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구교도들이 대거 밀려들자 위협을 느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신대륙의 종교자유를 타파하려 한다는 음모론이 나돌면서 미국태생 개신교도들은 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결사대에 관해 물으면 무조건 ‘모른다’고 말한다 해서 ‘모른다(Know-Nothing)‘ 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들은 독일과 아일랜드에서 온 이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미국사회를 전복하려드는 위험한 존재라며 “돌아가라”고 협박했다. 1855년 미국당(American Party)으로 개명하고 몇 년 정당 활동도 했던 이들은 가톨릭, 외국인, 이민자 배척을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이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유태인, 중국인 등 아시안, 히스패닉, 무슬림으로 공격대상을 바꾸며 미국의 반이민 정서는 이어져 왔다. 이민의 나라, 미국은 역설적으로 반이민의 유구한 전통을 가진 나라이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수사는 유색인종과 이민자를 향한 미국의 도도한 인종차별사의 상징이다. 백인만이 진짜 미국인이라고 믿는 인종주의자들이 거리에서, 상점에서, 식당에서 툭하면 내뱉는 말인데, 이번에는 대통령이 그 말을 했다.

국경의 열악한 난민수용 실태 등 트럼프 행정부의 비인간적 반이민 정책을 맹비난한 민주당의 초선 ‘4인방’ 여성하원의원들을 향해 트럼프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험한 말을 했다. 유색인종인 이들은 모두 미국시민이다. 파장은 크고, 의미는 깊다.

지난 14일 새벽 5시 27분 트럼프가 ‘진보적 민주당 여성하원의원들’을 겨냥하며 조롱과 공격의 트윗을 날린 후 워싱턴은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여성의원들은 즉각 반박 기자회견을 열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트럼프를 호되게 비판했으며, 민주당 다수 연방하원은 트럼프 발언 규탄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럴수록 트럼프는 기고만장해 “돌아가라” 발언의 강도를 높이고, 초지일관 트럼프에 대한 지지층의 인기는 높다. 17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2020 대선 첫 캠페인에 나선 트럼프를 향해 지지자들은 “돌려보내, 돌려보내”를 외치며 열렬히 화답했다.

그들의 의식에서 미국은 분명하게 둘로 갈라져 있다 - 백인과 유색인종. 트럼프는 지난 선거에서도 이번에도 ‘백인’을 선택했다. 소수계 표에 연연하지 않는다. 트럼프 진영 2020 대선 전략은 ‘백인의 나라, 미국’으로 맞춰질 것이다. 미국을 다시 하얗게, 그래서 다시 위대하게로 요약될 것이다.


21세기의 특징은 세계화이다. 상품, 서비스, 자본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든다. 그 결과 심화된 것은 경제적 불평등. 가진 자들은 세계를 돌며 소득을 불리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갈수록 형편이 쪼그라든다.

인건비 싼 중국이나 동남아로 제조업이 대거 몰려나가면서 일자리 잃은 러스트 벨트의 백인들은 불안과 불만이 목까지 차올랐다. 근본적 문제는 소득갈등. 버니 샌더스 등 좌파는 소득 양극화와 빈부격차를 성토했다. 반면 트럼프는 분노하고 미워할 표적을 내세웠다. 잘 살던 우리가 왜 이렇게 됐나?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아서. 범죄? 멕시칸들이 몰려와서. 테러? 이슬람 때문 등등.

트럼프는 국가 정체성을 들고 나왔다. 상대적 박탈감에 젖어 있던 저소득 저학력 백인들에게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고 충동했다. ‘과거’는 소수계 눈치 볼 것 없이 백인이 주도하던 시절. 그들이 트럼프에게 열광하는 이유, 트럼프가 백인표에 올인하는 배경이다.

“우리가 세계를 리드하는 이유는 세계 모든 나라 구석구석으로부터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의 힘이다. … 우리가 행여 새로 오는 미국인들에게 문을 닫는다면 세계에서 우리가 갖는 리더십은 곧 잃게 되고 말 것이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말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다른 민족들은 또 다른 곳에서 모여들어 미국을 이루고 있다. 그렇게 다 함께, 다양성으로 미국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2020 대선에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 듣지 않으려면.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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